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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찌 Oct 22. 2023

물슐랭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고양이 음수량에 번뇌하는 집사들에게도 통용되는 속담이다. 고양이의 일 평균 적정 음수량은 몸무게 kg당 40-50ml. 고양이가 물을 적게 마시면 방광염, 신부전, 요로결석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고양이 음수량은 집사들이 민감하게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다.


  기준대로라면 5.5kg인 리지는 매일 최소 물 220-275ml를 마셔야 한다. 그런데 리지는 처음 왔을 때부터 물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일 육수가 담긴 습식 캔을 먹이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보려 했지만 습식으로 채울 수 있는 음수량은 100ml 남짓. 남은 120-175ml의 물을 마시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먼저 맛이 없어서 물을 안 먹나 싶어서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캣닢 티백을 차처럼 물에 우려 주어봤다. 그런데 리지는 물 냄새를 맡더니 바로 돌아섰다. 실패. 다음으로 물그릇이 마음에 안 드나 싶어서 다양한 종류의 물그릇을 사 봤다. 재질은 유리부터 도자기로 된 것까지 골고루, 모양은 낮고 넓적한 것부터 반구 모양으로 깊고 오목하게 파인 것까지 골고루. 물그릇 배치도 평소 리지가 잘 다니는 동선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했다. 그렇게 안방 문 입구, 안방 침대 앞, 거실 소파와 식탁 사이, 옷방 책상 뒤에 물그릇을 두자 리지가 물을 마시는 횟수가 조금 늘어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레오 집사님인 시어머님이 추천해 주신 정수기도 샀다. 구슬 같은 물방울이 계속 퐁퐁 솟아서 호기심을 자극하는지 리지는 요즘 이 정수기 물을 가장 잘 마신다(역시 육아처럼 육묘도 템빨이군).


  지켜보니 리지는 식수에 ‘미슐랭’ 같은 나름의 평가 등급도 매겨놓은 듯했다. 고양이 음수량을 평가하는 ‘물슐랭’이 있다고 치고, 그 인증마크를 미슐랭의 스타(별)가 아닌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젤리로 치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유리/사기 물그릇에 고여있는 물은 ‘수질이 훌륭한 물’인 ‘1젤리’다. 리지는 이 물을 지나가다 보면 와서 목을 축일 정도로는 봐주는 것 같다. 다음으로 정수기 물은 ‘2젤리’다. 가운데에서 퐁퐁 솟는 물구슬을 보면 가끔 멀리서도 다가와 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꼭 이 물을 ‘수질이 훌륭하여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물’로 여기는 것 같다.

  물론 리지의 평가 기준은 때론 모호하다. 리지는 가끔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바로 보이는 물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마시러 가기 덜 귀찮은 정도’가 때론 리지에게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얼마 전엔 황당한 ‘3젤리’의 진실도 드러났다. 사냥놀이를 해 준 후 물그릇을 갈아주는데 놀랍게도 리지가 비어있는 한 물그릇 틀 뒤에 미리 와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막 새 물을 담은 물그릇을 놓아주자 리지는 코를 박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챱챱. 챠쟈쟙”

  ‘3젤리’의 물은 다름 아닌 집사가 막 코앞에 대령해 드린 신선수. 입맛을 다시는 리지가 마치 곤룡포를 입은 왕처럼 보였다. 리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대의 노동의 맛이 참으로 달콤하구나. 허허허”

  왕의 대비마마가 되어 이렇게 받아치고 싶었다.

  “앞으로 물은 주상이 직접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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