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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May 25. 2017

숨바꼭질

오후 6시, 밥솥에선 김이 터져 나왔다. 아내의 야근 통보에 오늘 저녁은 두 딸과 일찍 먹기로 했다. 둘째를 씻기고 밥을 준비하는 사이 첫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수업 중에 배웠다며 혀를 내밀어 인사하는 법을 알려주고, 친구들과 나눈 아재 개그를 선보였다. 


여러 일을 한 번에 못하는 나는 ‘그만하고 나중에 이야기할까?’ 싶다가도, 사춘기에 다가선 첫째의 수다가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기에 가만히 들었다. 가끔 이야기 흐름을 놓쳐 첫째의 화를 돋우기도 하고, 인형을 갖고 온 둘째와 역할 놀이도 하면서 두 딸과 서로 다른 대화를 이어 갔다. 게다가 사과까지 깎고 있었다.  

 

잠시 후, 지쳐서 털썩 주저앉은 나는 꾀를 냈다. “얘들아, 숨바꼭질할까?” 우리의 목표는 퇴근한 엄마가 현관문을 열 때 모두 숨는 것이었다. 엄마가 못 찾게 지금부터 어디에 숨을지 연습하자고 하니 아이들 반응이 무척 좋았다. 느림보 아빠는 사과를 입에 넣고 “그쪽은 잘 보여. 이불속에 베개 쌓아두고 우린 다른 방에 숨어 볼까?” 하며 이곳저곳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드디어 엄마의 퇴근 시간, 문 여는 소리가 나자 우리는 재빨리 움직였다. 첫째는 피아노 밑, 둘째는 큰방 이불속, 나는 다용도실에 숨기로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작은방 이불속으로 함께 몸을 숨겼다. 눈치 빠른 아내가 일부러 몇 차례 헛다리를 짚고는 살며시 다가와 이불을 들췄다. 낄낄거리던 아이들이 엄마를 보고는 와락 안겼다. 

 

사실 나도 아내를 안고 싶었다. 특히 아이들과 있을 때면 정말이지 아내가 그리웠다. 종종 사람들이 육아에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으면 장난감이나 초콜릿 대신 공동 양육자인 아내라고 말한다. 아내가 늦을 때면 힘이 빠지고 서운했다. 나도 직장 다닐 때 야근과 회식을 자주 했던지라 아이들을 두고 늦게까지 일하는 마음을 아는데도 말이다. 

 

거실에 앉아 환히 웃는 세 여인을 보니 그동안 나의 숨바꼭질에 외로웠을 아내와 심심했을 딸들이 떠올랐다. 미안하고 고맙다. 

 

우연한 기회에 지난 1월부터 월간지 <좋은생각>에 아빠 육아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숨바꼭질>은 지난 2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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