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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May 22. 2019

나는 보약을 지었고, 아내는 박효신 콘서트에 간다.

지금 필요한 건 ‘아이 돌봄’보다 ‘자기 돌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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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왼쪽 발이 금방 피곤해지고 퇴근 무렵이면 발바닥이 아프다. 부딪힌 것도 아니고 찔린 것도 아닌데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이라 ‘침을 맞으면 괜찮을까?’ 하며 집 앞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사는 내 몸 상태를 물었고 여기저기 눌러보고 다리를 접었다 펼쳐보기도 했다. 그의 문진에 답을 하다 보니 최근에 나의 몸무게가 꽤 늘었고 운동량도 점차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는 나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조금 더 길고, 이로 인해 자세가 뒤틀어져 무게가 한쪽으로 쏠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침을 맞고 부항과 찜질 치료를 한 후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놀라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멀쩡히 걸어 나간 남편이, 말짱히 걸어 돌아왔다. 그런데 카드 사용액이 만 원이 아니라 기십 만 원이었다. 맞다. 한약을 지은 것이다. 침 치료를 하겠다며 나간 내가, 그간 아내가 보약을 지어먹는 거 좋겠다는 말에도 밥이 보약이지라며 넘겼던 내가, 한의사의 권유도 없었는데 스스로 몸을 보하는 약을 지은 것에 놀란 것이다.   

  

언젠가 둘째 아이가 작은 랜턴을 갖고 놀다가 내 머리칼을 비추고는 “아빠는 그냥 보면 검은 머리 같은데, 불빛에 비추니 흰머리가 엄청 많은데.”라고 했다. 그렇다. 둘째가 여섯 살이지만 첫째는 벌써 열두 살이다. 육아 경력이 길어지는 만큼 나의 머리칼은 얇아지고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찌 머리칼만 그럴까. 어깨며 무릎 등 어디 하나 삐걱거리지 않는 곳이 없고 자녀의 말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의사를 보는 순간 무의식에 있던 ‘나도 건강히 젊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여느 양육자와 같이 육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가던 아내가 요즘 콧노래를 부른다. 로또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남편인 내가 갑자기 체력이 좋아져 육아와 가사를 전부 감당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도 아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내의 표정은 지난 8일 가수 박효신의 콘서트 티켓을 예매한 후부터 밝아졌다. 예매는 10분 만에 매진을 기록했고 우리는 두 차례의 예매에서 실패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예매하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할 즈음, 대기 예약을 통해 겨우 한 자리를 구했다. 아내는 혼자 가는 것에 잠시 머쓱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이내 박효신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이들의 생활 태도에 대한 반응도 덜 민감해지고 목소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내의 생활에도 아이의 생활에도 가족의 생활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종종 “육아하면서 뭐가 가장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아이들을 돌보기에 충분한 경제적인 여유나 가족과 함께할 시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능력 등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의 뜬금없는 한약 복용과 아내의 콘서트 티켓을 생각하면 양육자에게 필요한 건 ‘아이 돌봄’보다 ‘자기 돌봄’인 것 같다.     

 

하야시 유키오와 하야시 다카코 부부는 책 「근사하게 나이 들기」(2019, 마음산책)에서 ‘멋이란 무리하거나 뽐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자신에게 흥미를 갖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챙기느라 직장과 집안에서 일하느라 정신없이 생활하는 양육자라면 오늘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춰 자신을 관찰해보자. 내 몸 중 어느 부분이 아프다고 하지는 않는지, 예전에 좋아했던 가수의 근황은 어떠한지, 동호회 활동하며 손길이 머물렀던 악기나 라켓 같은 장비는 어디에 두었는지. 더 멋진 삶을 위해 오늘만은 ‘양육자’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오롯이 ‘나’를 보자. 삶의 불균형에 따른 부작용이 발바닥의 통증이나 가족을 향한 거친 목소리로 나타나기 전에 말이다.




* 베이비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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