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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light Mar 17. 2016

알파고 vs 엄마

- 외롭고 힘겨운 길

차랑 차랑. 신촌역을 빠져나오자 햇살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

얼마 만에 찾은 신촌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지금 나의 발걸음은 가볍고 기분은 더 가볍다는 것이다.    


10시다. 저녁이 아닌 아침 10시.

아이들은 모두 학교와 어린이집에 갔고,

나는 한 잡지에서 주관하는 <아빠 육아휴직 대담>에 참석하려

카페 <패턴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혼자 아메리카노, 에티오피아를 주문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열공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어로 활기차게 대화하는 사람도 있고, 코를 골며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는 사람도 다.


가지런한 소리들 속에서 나는 조용히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한참 빠져들고 있을 때 약속 시간이 되었고,

서로의 얼굴을 몰라 흩어져있던 대담자들은 한 곳에 모여 앉았다.     





쑥스러운 자기소개 후 육아 이야기가 시작되자 어색할 사이 없이 아빠 수다가 이어졌다.

쿵딱쿵딱. 쑥덕쑥덕. 하하호호. 그러다     


진행자가 <아내의 고마움과 그동안 몰랐던 수고로움을 알게 됐다면?>하고 물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음…….” 하고 있으니, “그대로 씁니다.”하고 웃는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나는 생각에 빠졌다.         



그동안 몰랐던 아내의 수고로움이라?          


  




<AI와 인간의 대결>,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린 이세돌 기사와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이 지난 15일 끝났다.

대국이 시작될 때 알파고의 승리를 예상한 이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대국이 시작되자 이세돌 기사도 대국을 지켜보는 우리도 예상하지 못한 알파고의 수에 놀라고 당황하고 좌절하기까지 했다.


한 해설가는 알파고의 수를 보며 훈련생이 저렇게 두었다면 혼났을 텐데, 점점 진행될수록 그것이 묘수로 드러나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해설가는 인간계의 바둑에는 존재하지 않는 수를 두고 있다고도 했다.

알파고는 1202대의 슈퍼컴퓨터로 엄청난 경우의 수를 헤아린다고 했다. 이에 홀로 맞선 이세돌 9단 3패 후 귀중한 1승을 거두었다.

긴 고민의 끝에 바둑판 위에 돌을 올리는 그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그렇게 길고 외롭고 치열했던 세기의 대결이 막을 내리던 때, 아내를 그리고 엄마를 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축복을 느꼈지만,

부모가 되어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기르는 것은 또 다른 아니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먹고, 싸고, 입는 것과 관련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제품과 방법이 있고 부모는 이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급격히 성장하는 아이의 변화에 맞추어 먹고, 싸고, 입는 것을 준비고, 나아가 배움과 미래를 일구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고와 갈등은 알파고가 1202대의 슈퍼컴퓨터로 만들어 내는 엄청난 경우의 수만큼 되지 않을까.    


육아 바이블이라 불리고 베스트셀러인 서적을 보아도, 다둥이를 훌륭하게 키운 육아 베테랑 선배를 만나도 참고가 될 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통용되는 정석은 있지만 알파고가 보여주는 특이한 수처럼 내 아이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들이 있고, 이는 오롯이 그 부모가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아빠 없이 엄마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면. 아내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는 거대하고 끝도 알 수 없는 장벽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

고요함과 외로움이 온 마음지배할 때,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실 아빠인 내가 육아휴직을 했다고 해서

집안에 있던 문제들이 갑자기 해결되거나 아이들의 사회성이 급격히 좋아지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의 식습관이 무너지기도 하고, 외출복이 꼬질꼬질 해지기도 했다.    


굳이 좋은 변화를 꼽는다면

결과에만 집착하던 아빠가 

생활의 과정을 함께 하며

가만히 아이들과 아내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아쉽게도 정말 아쉽게도 이세돌 9단은 5국에서 패했고 1승 4패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는 3국의 패배보다 5국의 패배를 더 아프다고 했다.    


다음날

제주에 간 그는,

딸의 손을 꼭 잡고서 가족과 함께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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