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충성한 D+23
매일 아침 울리는 기상나팔 소리는 여전히 매정했다.
어제의 피로가 다 가시기도 전에 하루는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고, 말 그대로 ‘굴러간다’는 말이 제격이었다. 언덕 하나를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났고, 총을 들었다 하면 웅크렸다가, 뛰었다가, 기어가기를 반복하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지급받은 차가운 군번줄은, 땀이 나면 살에 달라붙고, 뜀걸음을 할 때면 덜렁덜렁거리던 그것이 처음엔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없으면 오히려 허전하고 불안한, 그런 시점이 되었다. 몸은 늘 잔뜩 굳어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빈 듯 복잡했으며, 하루하루가 고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씩 이 생활에 스며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익숙해진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나는 이곳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오늘, 점호를 마치고 내무실로 돌아왔을 때 조교님이 봉투 하나를 건넸다.
순간, 가끔 문득 편지가 기다려지던 그 감정이 떠올랐다. 아빠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도, 그런 한 장의 종이 앞에서는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러 버린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낯설지 않은 글씨였다.
사랑하는 아들, 훈련병 이준서에게
편지 쓸 시간도 없이 바쁘게, 또 재미있게 훈련소 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소식 잘 받았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리고 많이 와서, 아빠는 회사에서 이런 저런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
준서도 알다시피 아빠는 통신 회사에 다니다 보니, 이런 날씨엔 전화 고장이 얼마나 날지 늘 걱정이지.
준서야, 요즘 훈련 힘들지? 오늘은 무슨 훈련을 받았니?
지난번 아빠 편지 기억하면서, 늘 좋은 생각으로 하루하루 잘 버텨내길 바란다.
즐거운 생활, 즐거운 마음.
물론 지금 네 생활에 ‘즐겁다’는 말을 쉽게 붙이긴 어렵겠지만,
그 마음 하나만은 마음속에 품고 지내다 보면,
분명 하루하루가 조금은 더 보람 있고 견딜 만해질 거야.
경계 훈련을 받는데 판초우의를 입었다고 했지?
아빠도 강원도에서 군 생활할 때 판초우의 참 많이 입었단다.
특히 수색대에서 근무하면서 수색, 정찰, 매복 훈련 때 자주 입었지.
저녁이면 그 판초우의를 텐트 바닥에 깔고, 올라오는 습기를 막으며 자곤 했어.
그때는 판초우의에서 냄새 안 났는데..
준서야,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다 보면,
어느 순간 '깡'과 '악'이라는 게 생긴단다.
그게 나중에는 사회에 나가서도 어떤 어려움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게 돼.
준서도 그런 감정을 슬며시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아빠는 그 ‘깡’과 ‘악’을 훈련소에서 처음 기압받으며 느꼈단다.
자대에 가서는 유격 훈련, 천리행군, 10km 구보…
지금은 다 옛 추억으로 남았지만, 그 시간이 아빠를 단단하게 만들어줬지.
그래서 아빠는 요즘 네 군 생활이 크게 걱정되진 않아.
같은 논산에서 군 생활했으니까, 어떤 곳인지 잘 알거든.
힘들고 고된 훈련이겠지만,
아빠 생각도 하면서, 건강하게 잘 버텨주길 바란다.
아직도 날씨가 덥긴 하지만, 이제 가을 바람이 가끔씩 불어와서 다행이야.
환절기에는 몸 조심하고, 건강하게 훈련 임하길 바란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편지 자주 써라. (몇 번씩 읽어본다)
디스커스는 아빠가 규칙적으로 밥 주면서 잘 키우고 있다.
아마 준서가 휴가 나올 땐, 손바닥만큼 자라 있을지도 몰라.
아침 기상 시간, 아직도 힘들지?
그래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다음에 또 편지할게.
2003년 8월 29일 17:20
사무실에서 아버지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판초우의를 텐트 바닥에 깔고 잤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아빠도 나처럼 땀범벅이 된 몸으로 판초우의 하나로, 밤을 버티고 아침을 맞이했겠구나.
아빠가 지나온 군대는, 34개월 하고도 1주일, 무려 1,000일이 넘는 긴 시간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깊이였다. 그 시간은 아직 닿을 수 없는 거리처럼 느껴졌지만, 그 마음만큼은 이렇게 온전히 내 안에 닿아 있었다.
내가 키우던 열대어 디스커스도, 나도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있었다.
✒️ 기억의 조각
아빠의 군대,
내 군대,
서로 다른 시간이지만한 장의 편지 속에서
그 시간들이 겹쳐졌다.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서로를 이어주고 있었다.
❤️ 스물한 살, 그 낯설고도 선명했던 시간을
매주 글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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