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의 온도 2. 은주 씨의 겨울

by 소요 김영돈

"온막리 403번 이은주 힐링드라마 아트센터" 동화작가 이은주 씨가 일생을 분투하여 되찾은 둥지다.


청도의 옥빛 계곡물 따라 새벽산책을 나갔다. 온막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에는 미네랄이 풍부하여 사람을 치유하고 대추나무, 감나무, 과수원의 수맥이다.
연시 하나를 따려고 하늘길까지 올라 목숨을 걸었었는데......
산책길에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키높이로 군락을 이루고 정원을 이루어 지난 계절을 상상하게 했다. 이 군락에 잎이, 꽃이 열매가 열리면 이곳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 가슴 벅차온다. 초봄부터 펼쳐지는 이들의 노랑, 연두 초록 주황의 풍경을 상상하며 과수원을 가로질러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겨울비 흠뻑 맞은 나무들이 시침을 떼고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은주 씨의 거처가 점점 멀어져 저 멀리 아득히 보인다.
감밭을 걷는 내내 홍시를 맛나게 먹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생전 이곳에 왔다면 어떤 표정일까.
'여기까지 오는데 50년이 필요했다'


한번 걸리면 온몸이 다 찢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던 대추나무가 말을 건넨다. "단단해지는 데는 배수진을 쳐야 해"


무릎을 툭툭 치며 감나무가 따라 웃으며 말한다.


"아무렴!"


동네 한가운데로 흐르는 옥빛 젖줄을 마신 감과 대추들은 또랑가, 산밑, 무덤 주변 갈대숲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를 내리고 번성한다.


병풍산, 대나무 숲, 5백 년 된 노송이 천천히 서있다,


노송은 운문사로 숨어든 막내딸의 마음을 알까. 어느새 은주 씨는 머리를 길러 마음밭을 차려놓고 환하게 웃고 있다. 세월이 대추나무처럼 굽고 덜 익은 감맛을 내며 흘러갔다. 그렇게 은주 씨는 춤추고 노래하며 여기까지 왔다.


은주 씨의 춤과 노래는 삶을 지향하고 휴식하며 생명을 키워내는 몸부림이자 날숨이다.

어머니 자궁에 착상되지 못한 꽃가루가 빗물에 떠내려갔다. 그 빗물 따라 떠났던 자식들은 하나둘 다시 온막리로 되돌아왔다.


여기는 어머니의 자궁이 지상에 재생된 곳 은주 씨의 아름다운 둥지 '힐링드라마 아트센터'다.
넬라판타지, 장밋빛 인생, 가곡 칠레꽃이 은주 씨의 청아한 목청을 타고 감나무 밭으로 대추나무옹이에 부딪히며 강 쪽으로 흘러간다.
은주 씨가 과수원 너머 산구름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앉아 아우성을 잠재우는 의식이다. 두더지처럼 떠오르는 생각들 사연들... 삶의 무게들이 은주 씨의 옷깃을 잡아채면 은주 씨는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고른다. 은주 씨의 들숨을 따라오던 사연도 하나 둘 산등성이 너머 구름 따라 빠져나간다.
성긴 그물망에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연들은 집주위를 맴돌며 대추가지에 걸린 연처럼 과수원을 떠돈다. 고개를 든 은주 씨의 긴 목과 생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분홍빛 얼굴을 타고 스며들어 목덜미로 굴러 떨어지는 사연들은 다시 목울대에 걸린다... 은주 씨는 꿀꺽 침을 삼키고 길게 숨을 고르며 호흡을 가다듭는다.
겨울비가 그쳤는가?
은주 씨는 그렇게 '겨울비 앞에서 거울을 본다.' 우윳빛 살결, 영롱한 눈빛 그윽한 미소~그리고 비를 피하지 않는 여유...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하고 말하는 은주 씨의 거처에 바람이 휘돌며 겨울비가 다시 한번 몰아친다.
차마 떠나지 못한 마음들이 비에 젖는다.
빗방울 소리와 함께 겨울밤이 깊어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적막한 겨울이 천천히 다가온다. 여름, 봄, 가을을 품은 대추 감나무 과수원으로 밤새 겨울비가 내린다.
새벽비~~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가슴에 묻어둔 기억들이 새벽안개처럼 살아난다.
은주 씨는 겨울을 끌어안는다, 그 겨울은 은주 씨의 진짜 겨울이자 거울이 되어 은주 씨를 비춘다.


'당신의 겨울, 어떤가요?'

하는 환청이 떠오른다.


'그래, 나쁘지 않다. 이대로면 그런대로 괜찮다.'


은주 씨는 자신이 품은 겨울에 자신을 맡긴다. 어머니의 산이, 물길이, 대추와 감밭에 포위된 은주 씨의 정착지를 품었다.
가을봄 여름이 지나간 청도 운문사에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옥빛 계곡물은 한겨울에도 힘차게 제 갈길로 간다. 분홍찔레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주 씨의 겨울은 옥빛 거울이다

이전 01화팽이의 온도 1. 여백 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