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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Jul 26. 2021

엄마 말이 다 맞아

조금 느린 엄마를 기다려줘야 하나 봐

집에 가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자주 하는 대화법(?) 중 하나는,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 이름을 차차 외워보게 하는 거다. 아빠나 우리 세 남매 이름은 오랜 기억이니 아직 엄마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사위들이나 조카들 이름은 쉽게 잊는 까닭이다. 아무래도 오래지 않은 기억이다 보니 별 수 없다.


"엄마. 사위들 이름 기억나요?" 매번 하는 질문이지만 엄마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한다. 치매 환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 엄마도 자기를 '기억 못 하는 바보 취급'하면 쉽게 분을 내기 때문이다. "음.. 흐흐..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는 게 무안한지 웃음을 지어 보이는 엄마.


기억을 해내면 좋기야 하겠지만, 쉽지 않은 걸 아니까. 일단은 엄마가 사위들보다 더 좋아하는(?) 손녀들 이름으로 넘어가 본다. "엄마. 큰 누나 손녀가 셋이잖아. 그건 알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인다.) 애기들 이름은 엄마가 자주 부르니까 잘 알겠네."


"은하잖아. 은하." 엄마는 용케도 첫째 이름을 기억해 냈다. 사실 셋째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엄마가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몇 번 봤던 둘째 이름은 좀처럼 엄마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나은이잖아. 엄마. 들으니까 기억나죠?"

뚜벅뚜벅 우리 엄마. 모자를 계속 거꾸로 쓰길래 고쳐 씌우느라 고생 좀 했다. 뒤에 있는 리본이 예뻐서 그런가 봐.

나는 그새를 못 참고 알려줘 버리고 말았다. 놀란 건 그다음 엄마의 반응 때문이었다. 엄마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은이 알지. 나은이 이름 엄마가 지어줬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아이들 이름은 누나와 매형이 논의해서 지어 왔고, 어떠냐고 묻기야 물었겠지만 엄마가 그에 관여한 적은 없으니. (엄밀히 따지면 우리 집 둘째인 누나 이름은 엄마가 지은 게 맞다. 그와 헷갈렸는지도 모를 일.)


순간 틀린 엄마를 바로잡아 주려다가 생각이 스쳤다. 바로 전날 일 때문이다. 아빠는 양치질을 하지 않고서 '했다'고 우기는 엄마를 다그치다가 울려 버렸는데, '바보 취급한다'는 게 그 눈물의 이유였다. 쉽게 달래지지 않는 엄마를 보며, 어떤 때는 무작정 '엄마가 맞다'고 말해야 할 필요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게 지금인 듯했다. "응. 엄마가 이름 예쁘게 지었네. 나은이가 이름같이 예쁘잖아." 엄마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특유의 '호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서는 누나가 보내준 손녀들 영상을 함께 봤다. 교회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는 나은이가 그 어느 때보다 귀여웠다.


계절이나 상황 따라 달라지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엄마가 아픈 뒤로 자주 꺼내는 말들은 정해져 있다. 밥 먹을 때면,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있잖아. 요리를 참 잘하셨거든"이라며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내고, TV에서 바다가 나올 때면 엄마 고향 마을인 해남 이야기를 꺼낸다. 거짓말 안 보태고 수백 번은 들은 이야기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묵묵히 듣는다. 괜히 말을 보태어도 본다. "엄마가 할머니 닮아서 요리를 잘하나 보네." 이제는 만두 하나 굽기도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며 울컥한 건 이런저런 이유로 비밀이지만.


점점 엄마가 무슨 말을 꺼낼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이 안 되고, 그게 괜히 무서워지기도 한다. 자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무언갈 찾기도 하고, 마르지도 않은 빨래를 개려고 하고, 느닷없이 장을 열어 옷을 정리하기도 하는 엄마. 무얼 찾느냐고,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시원한 답을 해내지는 못하는 엄마.


일단 지금은 기다려주고, '엄마가 맞다'고 말해 줘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아픈 걸 깨달은 뒤로 가족들에게 누가 될까 마음만 졸이는 엄마였고, 목사 아내로 살아오면서 하지 않아야 할 게 너무 많았을 엄마였고, 고향에서 멀리 떠나 친구가 없어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었을 엄마였을 테니까.


엄마. 그래요. 지금은 엄마 말이 다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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