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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Dec 01. 2022

아빠가 조심히 마음을 털어놓던 때

아빠, 요즘은 별일 없지요?

벌써 1년도 넘은 이야기. 서울에서 본가 내려가는 길, 역까지 마중 나온 아빠는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역 주변 약국에서 진통제나 먹고 가겠다는 아빠를 구태여 설득해 인근 정형외과로 끌고 갔다. 두말없이 진료를 받고 나온 아빠는 약을 3일 치 밖에 안 지어줬다며 투덜댔다.


운전하는 내내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던 아빠, 집에 돌아와서 편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는데 몸이 유달리 앙상하다. 살 빠진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심하다. 조곤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새 불면증이 너무 심해 약국에서 수면 유도제를 사다가 먹고 있다고.


며칠 머무는 중에 아빠라면 통 하지 않던 이야기를 술술 했다. 운전대 잡는 게 무섭다는 이야기, 사람들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 잠에 못 든다는 이야기, 엄마 걱정에 너무나 힘들다는 이야기… 나도 그리 민감한 사람은 아니지만 감이 딱 왔다. 우울증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연구와 조사로도 충분히 입증된 이야기고,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 위험이 1.7배 높아진다고 하니 절대로 무시할 만한 수치가 아니다.


더군다나 아빠는 혼자서 엄마를 돌보고 있다. 치매 환자 돌보는 일은 뒤치다꺼리만 하면 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서 더 쉽지 않다. 환자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말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 다 만날 수 없고, 환자와 함께 누군갈 만난다 해도 환자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지속되는 스트레스와 반복되는 일상은 우울증 유발에 최적이지 않은가.


아빠의 우울증. 워낙에 둔하고 덤덤한 경상도 아저씨인 아빠가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엄마의 치매만큼은 아니었지만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의 무심한 문자.


방도를 찾아야 해. 그나마 괜찮은 정신과에 가려면 대구까지는 나가야 했다. 당시에는 나도 운전을 못 했고, 아빠는 당연히 운전대를 잡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빠 친구 목사님께 부탁해 대구에 있는 한 정신과에 아빠를 데려갔다. 엄마도 혼자 있을 순 없으니 데리고 갔다. 환자를 두 명이나 데리고 가는 내 꼴이 없던 우울증도 생길 것만 같아 슬펐다.


아빠와 함께 의사 선생님을 대면했다. 기운이 다 빠져 있는 아빠는 본인의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고, 의사 선생님은 대번에 우울증 증세가 맞다고 말했다. 영락없었는지 조금 강한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전형적인 노인 고집을 부렸다. 약발이 센 것 먹으면 힘들지 않느냐고, 수면제 먹으면 나중에 혼자 힘으로는 잠을 못 자는 것 아니냐면서.


나는 반항하는 중학생을 나무라는 것처럼 아빠를 때리며 말했다. 아빠, 선생님 말 좀 들어. 나아지면 약은 약한 걸로 바꿔 준다잖아. 말 안 듣던 초등학생 시절 내 등짝을 때리던 아빠 마음이 이랬을까 하면서 끓는 울음을 삼켰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빠까지 왜 그러느냐고 원망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아픈 이후로 온 가족 신경은 당연히 엄마에게 몰려 있었다. 종종 전화를 걸어도 아빠보단 엄마 상태를 먼저 물었고, 엄마는 어떤지 이야기를 들을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와중에 아빠를 놓치고 말았구나.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빠는 말없이 창밖을 주시했다. 비쩍 마른 몸과 푹 패인 볼은 아빠를 괜히 더 처량하게 보이게 했다. 본인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계속 부정하고팠는데 전문가 도장이 찍혀 버린 셈이니 생각이 많아지기도 했을 것이다.


며칠 뒤, 서울로 돌아가면서 처음으로 엄마보다 아빠 걱정을 먼저 했다. 아빠, 약 잘 챙겨 드세요. 괜찮아진다고 혼자 끊고 그러면 안 돼요. (아빠는 무어든 자주 맘대로 한다) 엄마랑 산책도 꾸준히 하고요. 듣기만 하던 잔소리가 내 몫이 된 순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 보이는 순간이 이런 걸까.


사랑하는 막내 조카를 조심히 끌어안은 아빠.

이제 아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지만, 몇 달에 한 번씩 아빠 얼굴을 볼 때마다 속마음을 이야기하던 아빠를 떠올리게 된다. 아빠가 마음을 조심히 털어놓던 때, 그때야말로 얼른 단단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가 보다.


아픈 엄마와 아빠를 마주하기만 하면 나는 꿈꾸지도 않던 철학자나 종교인이 되는 것만 같다. 삶은 무얼까? 그보다 더 가까울 죽음은 무얼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가, 신이 있다면 어쩜 이럴 수 있나, 신이 존재한다면 위로가 될 것도 같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어서 가만히 웅크려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는 이만치 쏟아지는 장대비도 지나가 주겠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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