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대화

by DrChoi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은 은퇴한 노년의 주인공 스티븐스가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소설이다.

스티븐스는 한 영국 귀족의 대저택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로 한 평생 일 하며, 자신이 맡은 업무를 충실히 해낸 인물이다. 충직한 스튜어드십, 맡은 일에 대한 성실한 집중, 높은 로열티와 관리 능력을 갖춘 매니저,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에게 강조하는 덕목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스티븐스가 모셨던 귀족은 사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동조한 전범 부역자였고, 스티븐스는 그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시점에 깨닫게 된다. 정확히는 현역 시절에 일 할때도 충분히 그런 판단을 할 사건들을 목격했지만, 자신은 그런 국가적 대소사나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서 판단을 유보한다. 스티븐스는 그저 맡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군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항변과도 유사하다. 홀로코스트 현장의 실무적인 책임자로서, 그는 효과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학살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명령에 따라 수행했을 뿐, 아무런 죄가 없다고 변호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아웃소싱하는' 태도, 혹은 판단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비록 그 판단이 어렵다해도, 완전히 마음에 드는 선택이 없다해도, 어떤쪽이든 둘 다 썩은 것 같더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선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믿음을 가져야하고, 책임을 질 용기를 길러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선택하여 행동하지 않고, 그저 모든 옵션을 비아냥거리기만 할거라면, 차라리 내가 ChatGPT랑 대화하지 왜 너랑 얘기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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