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걷고

2년 코스웍을 마치며

by 명연재

12월 마지막 주.

박사과정 코스웍 2년이 끝났다.


해야 할 일을 목록에서 하나둘 지워가는 사이, 학기가 끝났고 한 해도 저물었다. ‘조금만 더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손대지 못한 채로 끝났다. 매 해 그랬고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코스웍 2년.

교수라는 꿈을 향한 첫 번째 관문. 시작할 때의 희망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은 까마득히 잊혀졌다. 이젠 눈앞에 닥친 종합시험과 앞으로 먹고 살 방도가 걱정이다. 참으로 간사하다. 하나 고비를 넘기니 곧바로 다음 걱정거리를 끌고 온다.


허겁지겁 쫓기듯 달리듯 지난 2년,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 1. 박사과정, 너무 쉽게 시작한 건 아니었니?

나름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현실은 달랐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야. ‘박사라는 걸 하다 보면 기회가 열리겠지.' 이렇게 믿었거든. 지금 보니 근거 없는 믿음이자 일종의 희망고문이었어.


질문 2. 정말 공부하고 싶은 걸 찾았어?

내가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나? 솔직히 그걸 잘 모르겠어. 박사과정 지원하는 연구계획서에는 인터넷상의 빅데이터로 소비자 행동심리를 분석해 보겠다고 적었는데, 지금 내가 하는 연구와는 거리가 있어.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시작했던 것 같아.


지금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라기 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는 말이 더 타당할 거 같아.


질문 3. 앞으로 미래는?

코스웍 2년을 무사히 마쳐서 기뻐. 그렇지만 주변에 졸업한 박사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보면 우울해. 그래서 마냥 기뻐하기만은 힘들어.


불안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 딴생각하지 않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교에 나와서 공부하려 해.


며칠 전 지도교수님이 부르시더니 말씀하셨어.

"지금 회사 돌아가도 별 볼 일 있겠어? 거기서 몇 살까지 더 할 수 있겠어? 박사 하면 그래도 70까지는 현역으로 뛰지 않겠냐. 괜히 서둘다가 이상한 데 가서 학생 모집이니 산학협력이니 등의 온갖 행정 업무에 시달리는 애매한 자리 말고, 단년 계약이라도 오래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졸업 이후 진로 이야기를 교수님께 처음 들었어. 이 길이 앞으로 얼마나 험난할지, 이젠 실감 돼.


누구나 아는 회사의 높은 연봉과 각종 혜택을 포기하고 이 길을 선택했건만. 이젠 단년 계약직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파라다이스일 거라 믿고 천국이 없으면 만들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왔는데, 맞닥뜨린 현실은 파라다이스와는 거리가 멀어.


질문 4. 왜 이렇게 된 거 같아?

글쎄, 철든 이후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 그때그때 최선의 다 하며 살아왔는데 이리되었네.


모교에서 교수가 된 선배가 있어.(참조 제12화 <아우라를 보는 사나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워. 그 선배가 이야기하더라고. 주변 친구들은 유학 가고 자신은 국내에 남아 공부했는데, 당시에는 자신이 모교에 부임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고 미래가 막막하기만 했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저 묵묵히 공부만 했다고.


영화에서 보면 그렇잖아, 주인공의 사소한 선택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곤 하잖아. 그동안 살면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편한 우회로만을 택해 왔던 건 아닌지, 부스러기 같은 작은 행복에 안주하며 취해 왔던 건 아닌지. 잘 모르겠네.


은빛 칼날이 일렁이는 여름 바다에 누워. 척추를 활처럼 구부리고 해초처럼 바다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아. 태양의 붉은 기운이 눈두덩이 주변을 붉게 데우고 귓가엔 물결이 찰랑거려. 바다가 나를 품은 것인지 내가 바다를 헤엄치는 것인지. 세상에 태어나서 생긴 꼴 대로 사는지 아니면 내가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사는지. 알 듯 말 듯 모르겠어. 이미 지나간 시간을 자책하면 뭐 하겠어. 이제 잘해야지. 남은 인생이 얼마 없잖아. 다시 마음을 다 잡아야지.


질문 5. AI 공부는 어땠어?

의욕적으로 공부했어. 20대 젊은 대학원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텼어. 이제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듣는 것도 끝이 났네. 듣고 싶은 AI 수업을 원 없이 들어서 기뻐. 분명 최신 AI 알고리즘에 대해서 익숙해지긴 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됐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놀지는 않았는데, 코스웍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왜 이리 허망한지. 내 힘이 닿는 한 일찍 일어나 꾀부리지 않고 자리에 앉아 공부했는데…


그중 하나 분명히 배운 건, 내가 아는 줄 알았던 것이 실제론 아는 게 아녔다는 거야. 더 엄밀하게는 무언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실로 대단히 어렵거나 사실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


질문 6. 2년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첫째, ‘무언가를 안다 ‘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는 거야. 따라서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건 전혀 별개의 얘기가 돼. 이 깨달음은 내가 앞으로 삶을 사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적용하게 될 것 같아.

둘째, 수업, 논문, 분석 도구, 프로그램 등에 쏟아부은 시간들, 무엇이 우선이고 중요한지조차 모르면서 흘려보냈어. 그런데도 어느덧 코스웍의 종착점에 다다랐어. 흘러가는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코스웍이라는 목표 하나는 끝났잖아, 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무의미와 하찮음의 시간들도 함께 있었어. 나는 시간이 가지는 이런 이중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셋째, 계획은 늘 어긋났어. 애초에 계획이라는 건 불가지(不可知) 영역이 아닌지? 그래서 받아들이려 해. 세상일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때때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어. 하지만 마음을 잠시 돌려보면 너무나 큰 축복이었어. 준비 없이 시작했지만 여기까지 왔고, 가족이 믿고 지원해 주고 있고, 전혀 예상 못 한 사람들이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고, 게다가 이런 나를 제자라고 받아주신 분도 있으니 말이야.


질문 7. 앞으로의 계획은?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솔직히 말해 이렇게 말하는 게 편하고 나 다워. 학교생활 2년 동안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절감했어. 아무리 미천하고 약하더라도 소망은 가질 수 있잖아. “모교에서 공부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교수가 되고 싶어." 다만 나에게 그 정도의 재능이 있을지, 운명의 여신이 내게 미소 지을지는 모르겠어.


코스웍을 마친 기념으로 전인권 밴드의 연말 콘서트에 다녀왔다. <걱정 말아요, 그대>를 시작으로 들국화의 명곡들이 이어졌다. 한참 노래를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 그가 말했다. 어눌했지만 진솔한 말투였다.

“제가 화장실에 갔거던요.

거울을 보는데 제가 너무 잘 생기고 멋있는 거예요.

그래서 힘을 냈어요. 다시 노래하자고. “


이어서 그는 <걷고 걷고>를 불렀다. 눈을 감았다. 매서운 겨울 산 어딘가에서 울부짖듯 노래하는 짐승이 보였다. 한동안 여러 스캔들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세상에 나온 그는 애절했다, 공연장을 나오니 밤공기가 싸늘했다. 하얀 입김으로 안경에 습기가 찼다.


그래, 지금까지 잘해 왔어.

울부짖는 짐승처럼 공부해 보자.


p.s. 커버 작품: 변시지, <귀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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