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마음속으로 '담설전정(擔雪塡井)'을 되뇌며 지냈다.(<제18화: 미안, 안될 거 같아> 참조).
그렇게 코스웍 4학기도 흘러갔다. 어느새 여름은 사라지고, 늦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학생에게 흔히 통용되는 이 말이, 내게는 왜 그리 어려운지. 책을 붙들고 있어도 잠시 뿐,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괜찮다며, 다 잘될 거라며, 담설전정해야 한다며 스님 염불 하듯 자기 최면을 걸었다. 코스웍 2년의 끝자락에 가까워질 수록 마음을 다잡으려는 노력 또한 더욱 치열해졌다.
무엇이라도 조치를 취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겠다." 라며 출사표를 던지고 시작한 길이었다. (<제4화: 인생리셋출사표(feat. 퇴사> 참조). 2년 가까이 학교에서 생활을 하니 꿈꾸었던 미래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교수, 원래 만만한 목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하고 시작한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을까? 삼국지의 제갈량도 촉의 미래를 뻔히 예견하면서도 선주(先主) 유비와의 의리 때문에 출사표를 던진 건 아닐까. 나이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통장 잔고는 야금야금 줄어갔다. 그런데 손에 쥔 성과랄 게 없었다. 노력이 능사가 아닐지도 몰랐다.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안되면 다음에 하면 되지.
이 흔한 말 또한 내게는 쉽지 않았다. 마흔다섯에 시작한 공부, 내년이면 마흔일곱이 된다.
가슴에 병이 있어 얼굴이 희고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자태가 뭇 사내들의 마음을 녹였다. 어느 고서(古書)의 기록된 절세 미녀에 대한 묘사이다. 나는 겉으론 거침없는 장비처럼 살았지만, 속은 가슴 병을 앓는 여인처럼 지냈다.
이번 가을 나는, 조약돌 하나만 떨어져도 파문이 번져 야단법석이 되는 고요한 연못처럼 사소한 충격에도 바스러지는 메마른 낙엽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으니 펜 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詩)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두 편의 짧은 시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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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름 없는 꽃
버거운 몸을 일으켜
몇 발짝 걸어가
머리에 차가운 물을 붓는다.
서서히 의식이라는 것이 깨어난다.
어젯밤
속을 부단히도 어지럽히던 알 듯 모를 듯한
수식과 문장들
뒤엉켜 밥, 콩나물, 고추장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간다.
라디오에서는
저렇게 떠들어도 병이 안 날까 싶은 사람들
즐거운 웃음이 쉴 새 없고
나는 내가 사는 하루라는 곳에 다다른다.
원래 나는 농부라
하루라는 밭을 간다.
분명 내 밭이건만 내 손이 미치지 못한다
그간 갈았던 밭 또한
아침이면 아무 흔적도 없다.
꽃을 피우려 했다.
꽃을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피울 수 있는 것이
꽃일지,
아니면 내가 꽃이라는 것을
피울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하루를 산다.
잊을만하면 도착하는 메일과 문자, 전화
정리하고 답하고
해야 할 숙제를 지워나간다.
무언가를 해냈다고
그게 내 것이라고
여기저기서 야단이다.
고작 이걸 가지고...
묻고 싶다가도
나라고 대체 뭐가 다른지 생각하면
입이 다물어진다.
결국,
그토록 꽃이라고 믿고
피우려 했던 그것
내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을까.
--- 10월 11일 화요일, 연구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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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낙엽
발아래 낙엽이 뒹군다.
메마른 오징어처럼 굽고
물기라고는 없는 그것이
스슥, 슥슥 아스팔트 바닥을 긁으며 스친다
이맘때면,
깊은 산속이든
쉴 새 없이 차가 달리는 도로 곁이든
나무는
모든 걸 짜내어
희뿌연 잿빛 속살을 드러낸다.
힘 다한 마지막 매달림 끝에
바닥에 떨어진 낙엽
잠시나마의 온전한 형체로
찬 도로 위를 긁듯, 스치듯, 뒹굴듯
흘러간다.
흙이라고 보기 조차 힘든
도시의 보도블록
이내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자전거와 분주한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안다.
몸이, 마음이, 눈이, 얼굴이, 손이, 입술이
메말라 간다.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워도
낙엽처럼 굽어 간다.
잠시만의 인생에서
어차피 떨어지면
이만도 저만도 아닌 것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아니면 이유 없이 사는 것인지 묻다가
지친 나
기대도 없이 스스로 되뇐다.
어느 성인은 사람을 안다고 했고
그래서 사람의 말을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리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니
나는
잡을 손도
기댈 온기도
짚고 갈 지팡이도 없는
그저 추운 바람에 흩날리는 삶인 것을
--- 11월 20일 일요일, 도서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