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캄보디아에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파견된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이번 달이 끝나면 여섯 달, 절반의 시간이 지나가게 된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봉사활동에 대한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와 다른 이곳 아이들에게서 경쟁과 관련된 생각을 자주 떠올렸고 무엇이 바른 교육인지에 대한 생각 역시 자주 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와 이곳의 아이들을 비교했을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단순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아니 우리나라 교육은 그 나름대로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느리지만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곳의 교육제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때 보여주는 모습 역시 감탄을 하게 만드는 일이 자주 있지만 그렇다고 이 아이들의 교육 태도가 한국의 아이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일방적으로 하기는 역시 어렵다. 이 문제는 차차 지켜보면서 정리를 해야 할 문제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날씨는 점점 더 더워졌다. 내가 바탐방에 온 2월의 날씨가 그나마 생활하기에, 한국에서만 살아온 내가 살기에 적절했다. 3월이 되면서 기온이 점차 오르기 시작했는데 4월에 절정을 맞이한 것 같았다. 캄보디아 설날이라는 쫄츠남 전후해서 기온은 43도까지 치달았다. 당연히 한낮에 밖에 나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기 때문에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학교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 전에 나가면 더위로 인해 집까지 가지도 못할 듯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학교에서는 한 주간 휴가, 즉 단기방학을 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이곳의 아이들 역시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더운 나라에 무엇을 하러 왔는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그 더위를 한 걸음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더운 시간을 밀어내면서 나는 아이들과 점차 가까워질 수 있었다.
2024년 6월 7일, 금요일. 나는 두 명의 아이와 함께 프놈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프놈펜 세종학당에서 말하기ㆍ글쓰기 대회를 개최했는데 내가 가르치고 있는 3학년 학생 두 명이 글쓰기 부문에 참가를 했다. 그리고 며칠 전 두 학생 모두 입상자로 결정이 되었으니 시상식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게 지난 화요일이었다. 수요일, 아이들을 사무실에 불러 상을 받게 된 것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시상식에 참여할 것인지 물었다. 이곳 아이들, 단번에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 듯했다. 두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로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안 가도 괜찮으니까 여러분 생각만 이야기해 줘요.”
그래도 머뭇거리기만 하던 아이들
“갈게요.”
“가겠습니다.”
“그러면 금요일 수업 마치고 오후에 출발하면 어떨까요?”
“금요일 밤에 가면 안 돼요?”
“왜 그러지요?”
“밤에 침대버스를 타고 가면 아침에 프놈펜에 도착할 테고 그러면 숙소를 구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프놈펜 인근 캄퐁스퍼가 고향인 쏘다윈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 아이는 명절 때나 방학 때 고향 갈 일이 있으면 그렇게 간다고 했다.
“그러면 아침에 세수도 하지 못하고 시상식장에 가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
아이들이 망설인 것은 경비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숙소를 구할 테니 시간이 되는지만, 그래서 금요일에 갈 수 있는지만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두 아이 중 한 명인 쏘다윈이 평일 오후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안경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괜찮다고 했고 다른 아이, 즉 쓰레이로엇 역시 특별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아도 괜찮냐고 내가 물어보니 두 아이 모두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난 뒤, 내가 쏘다윈의 고향에 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순간적으로 약간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쏘다윈, 집에 연락은 해 보겠다고 한다. 쏘다윈의 고향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 안 가면 토요일 행사 마치고 바로 바탐방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부모님께 한 번 물어보면 좋겠다, 대답을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한 뒤 두 아이를 돌려보냈다.
쏘다윈의 고향은 프놈펜에서 가까운 캄퐁스퍼란 곳이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 멀리 바탐방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을 이번 글쓰기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쏘다윈에게 고향에 같이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프놈펜에 있는 세종학당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었고 또 캄보디아의 시골 마을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내가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대구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고향을 떠나온 것처럼 역시 그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쏘다윈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그의 고향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섯 달 정도 캄보디아에 살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도시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한 번도 현지인의 집을 방문해 본 적이 없었기에 쏘다윈의 고향에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내 오랜 과거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새로운 곳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편린들을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쏘다윈에게 제안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난 뒤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쏘다윈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하면 저녁 먹을 시간에 도착할 테고 내가 예약해 둔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아홉 시 반까지 행사장인 왕립농업대학교에 가면 된다. 행사를 마치고 난 뒤 오후 시간과 쏘다윈의 고향에서 보낼 시간은 여러분이 결정을 하면 그대로 하겠다, 그러니 프놈펜에서나 캄퐁스퍼에서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이야기를 해 달라. 이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결정을 해야만 하는 문제는 아니니 결정이 되면 그때 상황에 맞게 하자고 말한 뒤 나는 학교로, 아이들은 아르바이트 하는 곳과 집으로 돌아갔다.
프놈펜까지 걸리는 시간은 버스로 다섯 시간. 버스가 출발한 뒤 잠시 프놈펜이나 쏘다윈의 고향에서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곧 이야기가 끊어졌다. 버스 안이 조용해서 이야기를 계속하기가 눈치 보여서 그렇기도 했고 또 아이들이 아직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해서 그렇기도 했다. 아이들이 지금 3학년이고 거의 2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한국어를 배웠지만 그렇다. 이건 아이들의 문제는 아니다. 낯선 언어를 배우는데 2년 반이라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좀 나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글쓰기 대회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냈는지도 모른다. 처음 아이들이 쓴 원고를 봤을 때 생각이 난다. 아이들이 써 온 글은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들이 많았고 어색한 문장, 잘못된 문장이 무척이나 많았다. 무엇보다도 내용 전개가 뒤죽박죽이었다. 앞에서 한 이야기를 뒤에서 또 하는가 하면 한 단락 안에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같이 들어있기도 했다. 아이들이 쓴 원고를 처음으로 본 뒤 아이를 한 명씩 불러 글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정리해 보도록 했다. 쓰레이로엇은 ‘내가 본 한국의 첫인상과 이미지’란 주제로 글을 써 왔는데 그 속에는 충북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생활했던 4개월의 이야기가 아주 피상적으로 쓰여 있었다. 생각은 있으나 그것이 말로, 글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된 계기, 비행기에서 내려서 바라본 인천 공항의 첫 느낌, 차를 타고 충북대학교까지 가면서 바라본 한국의 모습과 그 느낌, 충북대학교 기숙사에 대한 이야기, 충북대학교에서 들은 한국어 수업, 학교생활을 하면서 다녀온 한국의 여행지, 한국에서 주로 먹었던 음식과 그 느낌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쓰면 좋겠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런 다음 쓰레이로엇이 써 놓은 원고를 보면서 맞춤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나 잘못 쓴 문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어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쏘다윈은 ‘한국어를 배우면서 얻게 된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왔는데 역시 쓰레이로엇이 처음 써 온 원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맞춤법이나 문장 쓰기에서 이야기할 것이 많았다. 글의 전개 방식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쓰레이로엇과 마찬가지로 우선 글 속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 보자고 했다. 쏘다윈의 글 속에는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어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한국인 친구를 만나 같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즐겁게 지낸 일, 한국인 중학생에게 캄보디아어를 가르쳐주고 자신은 한국어를 배운 이야기, 한국인이 운영하는 안경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얻은 것 등이 두서없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쓰레이로엇보다는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서 그것만 잘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쏘다윈에게도 맞춤법, 문장 쓰기, 그리고 글을 전개하는 방식, 단락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난 뒤 다시 원고를 써 오게 했다. 역시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했다.
글을 다듬는 과정을 몇 번 거친 후 드디어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된 글은 내가 보기에도 내용이나 전개 방식이 좋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한 것은 조언을 해 준 정도였고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모두 학생들이 했다. 물론 나중에 원고지로 옮겨 적을 때 띄어쓰기를 비롯하여 원고지 쓰는 방법에 대해 도움을 많이 주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원고지 쓰는 것까지 요구를 할 수 없었으니, 뛰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날 것을 요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프놈펜으로 가는 길, 버스가 두 시간 정도 달렸을 때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가시거리가 10미터도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운전기사는 속도를 크게 줄이지 않고 달렸다.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는데 잠시 아이들을 깨워 그 모습을 보게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내게는 신기하고 약간은 위험하게 보일 듯한 그 모습이 이 아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일 테니까.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이면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고 또 가시거리가 50미터도 안 되는 길을 달린 적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나온 웃음이었다. 뭐든 신기하게 보고 또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2시에 바탐방을 출발한 버스는 정확하게 7시가 되어 프놈펜에 도착했다. 다행히 프놈펜에는 소나기가 아닌, 아주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랑비다. 곧장 툭툭을 불러 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한 뒤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봉사단원이 주로 머무는 호텔은 일전에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머물렀던 호텔과 그리 멀지 않았고 그때 몇 번씩 가본 식당이 있어 아이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일본식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캄보디아인인 아이들에게 다른 나라의 음식을 맛보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해서 그렇게 했다. 이번 일정에서 기회가 되면 한국식당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생각이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밖으로 나오니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왕궁이 가까이 있고 또 그 옆에는 메콩강이 흐르고 있으니 소화도 시킬 겸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별말 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다. 식당에서 나와 걸어서 왕궁으로 갔다. 약 15분 정도 걸어가니 왕궁의 담벼락이 나타났고 그곳을 돌면 나타나는 왕궁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일전에 왔을 때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싸들고 와서 광장에서 노는 모습을 보았는데 밤에 찾아간 그곳은 너무나 조용했다. 메콩강변의 풍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식과 음료수를 파는 곳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산책을 마치고 난 뒤 호텔로 돌아와 각자의 방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약속한 7시 30분에 식당으로 내려가니 아이들이 벌써 와 기다리고 있다. 이 아이들, 말로 듣던 것과는 다르게 약속을 아주 잘 지킨다. 어제는 오후 1시 30분에 내가 살고 있는 숙소 입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무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래서 나도 급하게 준비를 해서 아이들을 만나야 했는데 오늘 역시 그러했다. 뷔페식으로 된 식당에서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 가져와서 많이 먹으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들 먹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비싼 돈 주고 먹는 것인데 많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8시 반에 다시 호텔 로비에서 만나 행사장으로 갔다. 왕립농업대학교, 숙소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친절한 툭툭 기사님이 행사장 앞까지 잘 데려다 주었다. 내려서 보니 시간이 좀 남아서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다 행사장을 찾아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프놈펜 세종학당이라 쓰인 간판이 보였고 그 맞은 편으로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니 그곳이 행사장인 모양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곳에서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온 교수님과 세종학당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먼 곳에서 온 우리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했다.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나는 세종학당 선생님, 덕성여대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했다.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일에 대해 내가 물어보았고 그들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어떻냐고 내게 물어보았다. 또 일전에 바탐방 지역, 특히 바탐방대학교에 세종학당을 세우려 했다가 포기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임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말을 꺼냈더니 숙명여대 교수님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세종학당에서 학교 측과 만나 이야기를 진행시켰고, 학교 측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 보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비슷한 성격의 두 기관을 동시에 지원할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 때문에 사업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코이카는 외교부에서 담당을 하고 세종학당은 문체부에서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게 문제가 되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자신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규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다시 현지인 채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대학도 그렇지만 세종학당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현지인 교수가 있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한국어학과 졸업생들이 졸업 후 일할 수 있는 곳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세종학당에서도 적극적으로 동의를 해 주었다. 다만, 아직까지 현지인 중에서 한국어 교사 자격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종학당은 현지 채용이 가능하니까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 보겠다고 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서로 인사를 하기에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와 학생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시, 현지인 학당장의 인사와 함께 행사가 시작되었다. 세종학당 출신 현지인이 사회를 맡아서 진행을 했다. 이어서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님이 말하기 대회 심사 기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번 대회는 예쁜 글씨쓰기, 글쓰기, 그리고 말하기 세 영역에 걸쳐서 진행이 되었는데 오늘은 말하기 대회 본선만 진행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글씨쓰기와 글쓰기는 이미 받은 작품에 대한 심사를 마쳤고 오늘은 시상식만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인사가 끝나고 말하기 대회가 시작되었다. 나나 아이들 모두 관심있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첫 번째로 왕립프놈펜대학교(RUPP)에 다니는 남학생이 발표를 했는데 내용도 괜찮았고 표현하는 방식도, 전달력도 상당히 좋았다. 이후 몇 명의 학생들이 발표를 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자주 더듬거리면서 겨우 발표를 이어갔다. 그러나 중간에 원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지 말하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기에 내가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따라서 박수를 치면서 그 아이를 격려했지만, 그 아이는 끝내 발표를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무대에서 내려와 버렸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여섯 명의 학생들이 발표를 마치고 심사를 진행하는데 늦게 온 여학생 한 명이 부랴부랴 무대에 오르더니 자신이 준비해 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역시 RUPP에 다니는 학생인데 그런대로 잘했다.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축하 공연을 했다. 먼저 말하기 대회 첫 순서로 발표한 RUPP 남학생이 노래를 했는데 깜짝 놀랐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연이어 나왔다. 그 생각을 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3학년 학생인 소캇이 내일, 그러니까 일요일에 시엠립 영사관에서 주최하는 대회 본선에 진출해서 노래를 하게 되어 있는데, 소캇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내지는 못했다. 도움이 되기보다는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학생 몇 명이 무대에 올라와 한국 시인의 시를 돌아가면서 한 소절씩 낭송을 했다. 세종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쓰기 부분에서 쓰레이로엇은 장려상, 쏘다윈은 우수상을 받았다. 최우수상을 받으면 다시 본선을 거쳐 한국으로 1주일간 연수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대회에 나온 아이들, 더 좋은 상을 받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듯했다.
12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엄청나게 더웠다. 물어보니 정문까지는 거리가 멀고 학교 안에도 식당이 있다 하기에 그 식당을 찾아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캄퐁스퍼에 가기 위해 툭툭을 불렀다. 오후 시간에 프놈펜 관광지 두어 군데 둘러보고 캄퐁스퍼에는 저녁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프놈펜 시내를 다니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다. 그래서 지금 바로 쏘다윈의 집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이들도 동의를 했다. 캄퐁스퍼까지는 비교적 먼 거리라 가려고 하는 툭툭이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긴 했는데 다행스럽게 툭툭이 금방 잡혀서 그것을 타고 길을 나섰다.
캄퐁스퍼 가는 길, 도로는 주말인데도 차와 오토바이가 많았다. 게다가 낡은 화물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은 내 코를 따갑게 만들었다. 마치 알리딘의 마술 램프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 같은 매연이 도로를 뒤덮고, 그 뒤를 우리의 툭툭이 달리고 있으니 안 그래도 더운 날씨가 더 덥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툭툭이 속도를 내서 그 트럭을 추월한 덕분에 매연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툭툭 기사가 가스를 충전하는 동안 사탕수수 주스를 사기 위해 길가로 나왔다. 충전소에 도착하기 전 쏘다윈이 갑자기 휴대폰을 보여주며 ‘선생님, 지팡이 주스가 뭐예요?’라고 묻기에 나도 모른다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쏘다윈이 손짓을 하면서 ‘저거요’ 했다. 보니까 사탕수수다. 아, 이 아이가 사탕수수 주스를 크메르어로 넣어서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데 번역기에서 ‘지팡이 주스’로 번역을 한 거구나. 이 아이들이 주스를 마시고 싶구나 생각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마침 길가에 사탕수수 주스를 파는 곳이 있어 가니 엄마와 딸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툭툭이 기사님 줄 것까지 네 잔을 주문하고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엄마가 사탕수수 나무를 기계에 넣어 갈면 거기에서 나온 물을 딸이 받아 얼음과 함께 주스를 만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엄마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아이가 너무 기특해서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얼른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아이 엄마가 딸에게 몇 살인지 말하라고 하니 그제서야 열 살이라고 한다. 열 살 난 딸아이, 엄마와 함께 사탕수수 주스를 만들어 파는 열 살 된 캄보디아 소녀, 안타까운 마음보다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번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길거리 음식, 특히 얼음이 들어간 음료는 가급적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캄보디아 사무소 코디네이터의 말이 떠올랐지만 오늘은 그냥 마셔보기로 했다. 단맛이 강했으며 더위를 식히기에도 적당했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런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일을 하는 모습 말이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동기 단원들과 같이 러시안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소녀, 열세 살이라는 소녀는 우리가 농담처럼 가격을 깎아달라고 했을 때 가격을 깎아주면 엄마에게 맞는다고 정색을 했다. 그때는 괜한 농담을 해서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외에도 길거리에서 과일이나 음식을 파는 어른 옆에 아이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어린아이들도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자주 확인하게 된다. 물론 소년 노동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도와주는 모습이 비록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나이에 일을 한다는 것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일을 하는 캄보디아 아이들의 모습에서 좀더 굳건하게 자신의 미래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싹을 보았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면서 온갖 갈등을 겪게 될 때 그것을 훌륭하게 조정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일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다. 열 살 난 딸아이,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아이가 엄마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는 살아가면서 맞딱드릴 힘든 시간을 너끈히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캄퐁스퍼까지의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게다가 툭툭을 타고 가는 길이 편하지 않아 더 멀게 느껴졌다. 1시간 정도 더 달렸을까, 드디어 학생의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집 마당에 도착했을 때 한 여인이 창고와 같은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학생의 어머니다. 학생은 툭툭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 어머니를 얼싸안는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학생의 어머니는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곧이어 뒤꼍에서 학생의 아버지가 걸어나왔는데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학생이 아버지와도 포옹을 하면서 인사를 했고 곧이어 나타난 동생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주변으로 다가왔다. 같이 간 스레이로엇의 통역으로 서로 인사를 한 뒤 의례적인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을 멀리 보내 놓고 보고 싶지 않으셨냐? 딸이 전화는 자주 하느냐? 딸은 학교생활 잘하고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주로 했고, 너무 멀리 있어 가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영상 통화로 딸아이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어서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오셔서 무척이나 기쁘다, 이런 이야기를 학생의 부모님이 했다.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나는 혼자서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할머니 자전거 뒤에 타고 가는 아이들, 새총을 들고 나무 밑으로 몰려다니는 아이들, 시골인데도 어린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집으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옆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 주변에서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개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며 오리가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닭은 무엇이 급한지 잽싸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가 된 듯 한 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캄보디아에 와서 의아하게 생각했던 몇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내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개들은 목줄이 없는 채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한 마리가 다닐 때도 있었고 두 마리, 세 마리가 어울려 다닐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싸우지 않았다. 상커 강 옆에 있는 절에 갔을 때는 어슬렁거리는 개 옆에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도 개는 그 고양이를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학생의 집에서 만난 풍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는 느긋하게, 그리고 오리는 뒤뚱뒤뚱, 닭은 종종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다른 동물이나 사람들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속담이 존재하지 않을 듯했다. 개는 닭을 쫓지도, 닭은 개를 보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한적한 시골 마을, 사람과 소와 개와 닭과 오리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다만, 저녁에 본 풍경이 약간 색다르긴 했다. 이곳에는 도마뱀이 많다. 저녁이 되었을 때 학생의 집 벽에도 많은 도마뱀이 오르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 마당에서는 오리들이 뒤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아주 가끔 벽 아래로 내려온 도마뱀을 향해 오리 몇 마리가 급하게 달려가곤 했다. 잡아서 어떻게 해 볼 요량이었겠지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잽싸게 벽 위쪽으로 도망을 가는 도마뱀을 보며 오리는 아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애초부터 잡아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이거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니라 ‘도마뱀 쫓던 오리 벽만 쳐다보는 격’이다. 하지만 뒤돌아서는 오리의 모습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기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쏘다윈의 아버지가 크메르어 ‘꼬’는 한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묻는다. 내가 ‘소’라고 하니, 아버지는 몇 번씩 되풀이하면서 그 말을 해 본다. 그게 재미있었던지 자기가 알고 있는 동물들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어로 무엇이라 하는지 계속 물어보고 나는 대답했다. 학생의 어머니는 웃음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펴보니 각양각색이었다. 학생의 어머니는 해먹에 누워 건들건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약간의 술을 마셨는지 평상에 앉아 건들건들, 쏘다윈과 여동생은 하나의 해먹에 같이 누워 아주 살짝 건들건들, 거기에 평상 앞 의자에 앉은 나 역시 그 풍경에 녹아들어 조금씩 건들건들. 어떻게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만들어졌을까,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한 학생의 부모는 애써 격식을 차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캄보디아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정도였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딸이 잘 먹는 것을 하면 좋겠다, 학생이 잘 먹는 것은 나도 먹을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래서인지 수다스럽게 음식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로 나온 음식은 돼지고기와 물고기를 넣어 만 든 탕, 생선구이가 전부였지만 나는 아주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서로에게 무척이나 관대한 듯했다. 약간의 술을 마신 듯한 학생의 아버지가 내게 과장된 몸짓을 보일 때에도 어머니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웃을 뿐이었는데 그 미소 역시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괜히 예의 따지고 격식 차리면 그 자리가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이들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구나, 그래서 상대가 편하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아주 많이 드는 저녁이었다.
10시가 되기 전 간단하게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은 쉬 오지 않았다. 뒤척거리다 잠이 든 듯했는데 새벽이 되었는지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잠자리에서 들어보는 닭 울음소리다. 어느 순간 닭 울음소리가 멈추고 이번에는 찌르레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곧이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려온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방문을 열고 내가 자고 있는 곳까지 쳐들어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잠시 뒤 가까운 곳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열고 시간을 보니 이제 겨우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니, 그러면 여섯 시도 되기 전에 스피커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났다는 말인가.
간단하게 씻고 이른 아침을 먹는데 쏘다윈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도 찾는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난 뒤에 쏘다윈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어디 갔다 오시느냐고 물어보니, 며칠 전에 나간 소 찾으러 갔다 오는 길이라 한다. 그런데 얼굴이 태평이다. 아니, 며칠 전에 소가 나갔다면 점점 찾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 빨리 사람들 데리고 다니면서 찾아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말을 해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괜히 나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조금 머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 전 시골에서 자란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으레 소를 몰고 산으로 가곤 했다. 그곳에서 소는 풀을 뜯고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끔 소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만 되면 다시 놀이에 빠져들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이 간 친구들 모두가 그러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 소가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얼굴이 파랗게 되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 봐도 친구들 역시 모르는 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나를 혼내는 대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해서 모두가 산으로 몰려갔다. 밤이 되면 겁이 많은 소는 잘 움직이지 않고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조용히 숨어 있는다. 그래서 소를 찾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소 목에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듣고 소를 찾아오곤 했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내 일처럼 나서서 소를 찾아주곤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쏘다윈의 아버지도 마을 사람들과 같이 소를 찾으러 나서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에 그런 걱정스러운 말을 건넸던 것이다. 정말 소를 잃어버린 것인가? 이런 일이 이곳에서는 늘상 있는 그런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괜히 내가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을 먹고 쏘다윈을 따라 시장에 갔다. 쏘다윈은 과일을 비롯하여 집에서 먹을 것들을 샀다. 나는 슬며시 돼지고기를 사서 쏘다윈에게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쏘다윈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아침 먹은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다시 점심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냥 웃기만 한다. 10시가 되어 이른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여기서는 패스 앱이 실행이 안 되어 쏘다윈의 어머니가 툭툭 기사를 불러 10시까지 오게 한 모양이다. 이른 점심을 먹고 같이 사진 한 장 찍은 뒤 프놈펜으로 향했다. 날은 여전히 더웠다. 프놈펜에 있는 캄보링크라는 버스 회사에 도착해서 1시 2분 차로 바탐방으로 간다고 하니, 자신들은 그곳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는 본사에서 간다고 했다. 우리가 잘못 찾아온 모양이다. 그래서 쏘다윈이 툭툭 기사를 불렀는데 그 사이에 회사 직원이 나와 우리가 버스를 타야 하는 곳까지 가는 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가라고 했다. 급히 툭툭을 취소하게 한 뒤 회사 차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
바탐방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가 좀 덜 된 시간, 쓰레이로엇은 언니가 마중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갔고 쏘다윈은 툭툭을 타고 가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니 머리가 아파 그냥 가면 좋겠단다. 그래도 아픈 아이를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같이 한국식 식당으로 가서 나는 비빔밥을 먹고 쏘다윈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쏘다윈은 툭툭을 타고 갔다.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인 듯 여행 아닌 듯한 2박 3일의 일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에 돌아와 그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손님을 맞이해서도 전혀 꾸밈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 다시 와 주면 좋겠다며 선한 웃음 건네주는 학생의 부모, 그들을 닮은 듯 그저 소 닭 보듯 서로의 영역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동물들, 무엇보다 그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나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시간과 사람에 대한 욕심, 욕망을 조금씩 덜어내면 되지 않을까?
물론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들의 삶이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외국 땅에 와서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 않은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단편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지금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저출산의 문제, 과도한 경쟁으로 말라가는 인성, 그리고 참된 행복에 대해 말해주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교육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맞닥뜨려야 할 문제다. 그럴 때 나는 이곳 사람들의 순수한 미소와 자연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야기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캄보디아에 와서 배운 것이고 이것이 또한 봉사활동의 참 의미라는 것을 나는 다시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