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보면 끝나기 마련
결혼하고 3년째가 되던 해 7월에 자그마한 오피스텔에서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전세를 구한 것이지만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어 아내도 저도 무척 기뻤어요. 출산을 얼마 남기지 않고 이사를 결정해서 일정이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살던 집의 세입자가 잘 구해져서 제때에 이사할 수가 있었어요. 좁은 집에서 무거운 몸으로 지내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했는데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다 보니 돈이 제법 많이 필요했습니다. 냉장고, 세탁기 등등 신혼 때 사지 않고 미뤄뒀던 가전제품과 소파, 침대 같은 가구를 구매해야 했어요. 짠돌이인 저는 비용을 아껴볼 방법을 생각하다가 직접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집까지의 거리가 500m 정도여서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직접 짐을 챙기고 날랐던 터라 자신도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지금까지 10번 정도 이사를 했더군요. 아내는 짐이 생각보다 많을 거라며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한 저는 부모님을 모셔서 도움을 받기로 하고 아내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은 잠깐만 하면 될 테니 부모님을 이사하는 집에 모셔서 같이 시간을 보내려는 생각이었어요. 이사할 시간도 3일이나 있었지요.
그런데 생각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흘러갔습니다. 일단 회사에 긴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하루를 그냥 날렸습니다. 첫날에 짐 싸는 것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는데 말이죠. 퇴근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집안 구석구석에서 옷과 책,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들이 잔뜩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다음날 오전까지 짐을 싸야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짐을 싸고 다음날 부모님을 만나니 도와줄 사람이 생겼다는 마음에 두배로 반가웠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퀭한 눈으로 한가득 쌓인 짐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저에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눈이 가장 게으른 법이다.”
‘시와 주방장’의 ‘게으른 눈’을 읽으신 걸까요? 할 일이 잔뜩 쌓인 것을 보면 언제 다하나, 하는 마음이 들지요.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눈은 현상만 보기 때문입니다. 눈이 가장 게으르다고 하는 이유이죠. 그러나 손과 발을 꾸준히 움직이면 언젠가 끝이 납니다. 이삿짐 역시 마찬가지더군요. 일단 나르기를 시작하니까 짐들이 하나, 둘 사라졌습니다. 셋째 날에는 짐을 다 나르고 집을 비워줄 수가 있었죠.
이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쉬워 보이는 일도 어려울 수 있다는 것, 눈이 가장 게으르다는 것.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잊고 살기가 쉬운 것들입니다.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교한 계획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미루면 쌓이고, 쌓이면 더 하기 싫어집니다. 일단 조금씩이라도 하고 보는 것, 그것이 일을 마치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겨우 짐을 다 나르고 넓은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집이 넓어서 참 좋다 생각하며 말이죠. 그런데 눈을 뜨자 나른 짐을 정리할 일이 또 걱정입니다. 역시, 눈이 가장 게으른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