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

by 레이더

자, 시작하겠다. 이 놀이의 규칙은 유일하다. 내가 기준인 거다. 어떤 상황, 어느 때, 어디에서든 옳고 그름의 기준은 나다. 내가 생각하는 데에 부합하면 맞는 거고, 내 생각이랑 다르면 이유여하 불문하고 틀린 게 된다. 규칙은 이거 하나뿐이다. 그리고 틀린 사람에겐 응당 벌칙이 주어진다. 시작!

쿵쿵거리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린다. 소리에도 모양이 있다면 저 소리는 지그재그 갈지자 모양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부스러기까지 떨구면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이 벽에 쿵! 저 벽에 쾅! 이 계단에 쿵! 다음 계단에 쾅! 안단테 안단테 포르테시모의 파장이 이곳 4층에까지 독가스처럼 엄습해 온다. 유령이 있다면, 필히 저것일 것이다.

가까워 올수록 어린 우리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1층부터 4층까지. 왜 아무도 안 나오지? 어린 우리들한테만 들리는 건가? 세상을 잡아먹을 듯한 저 소리가. 곧 모든 걸 부숴버릴 것처럼 다가오는 저 소리가 듣기에 끔찍하지도 않나. 제발 문들을 열어요. 누구라도 좀 막아 서 주세요. 제발 어린 우리들끼리만 두지 마세요.

“야이 씨! 딸년들이라고 있는 게 나와보지도 않아?” 클라이맥스. 절정에 치닫느라 신발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그는 현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되새김질을 하는 소의 혀처럼 그의 혓바닥이 겉돈다. 뚫린 입이라고 씨부렁거린다. 침을 흘리고 콧김을 내뿜는 게 영낙없이 소다. 지옥에서 올라온 죽음의 소. 다 같이 죽자고 하는 거 같다. 엉금엉금 걸어서 어린 우리들에게로 온다.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떠는 서로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어린 우리들은 따닥따닥 붙어 앉아 있다.

으레 치르는 의식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정기적인 행사인데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그나마 잠이 들 기 전에 시작된다면 조금은 덜 얼떨떨하겠는데, 쥐도 새도 잠든 뒤에라야 벌어진다. 아랫집도, 윗집도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 찍 소리 하나 없는 정막 속에서. 모든 숨소리가 멈춘 것 같은, 지구마저 정지한 것 같은 바로 그때. “야이 씨! 아빠가 왔는데도, 딸년들이라고 있는 게 나와보지도 않아?”

자다가 봉변을 당한 어린 우리들은 줄줄이 화들짝 깨어난다. 언니가 자리를 잡으면 동생이 언니 옆에 꼭 붙어 앉고, 내가 동생 옆에 앉는다. 일상이 된 거나 다름없는 이벤트이기에 몸이 먼저 질서 정연히 반응했다. 그렇지만 눈은 여전히 감긴 상태다. 소름이 돋아 쭈뼛쭈뼛 머리털이 서는데도 눈꺼풀은 무겁다. 심지어 동생은 언니와 내 사이에 낀 채로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어린 우리들의 코앞까지 기어 와서 앉은 꼬락서니가 악마나 매한가지다. 쩍쩍 갈라진 가문 땅바닥에 선연한 균열 같은 실핏줄들, 그것들로 시뻘겋게 충혈된 눈, 숨 쉴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연신 코로 뿜어대는 시퍼런 분노의 기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불길한 언어, 유황 냄새같이 역겨운 구취와 체취, 육신이라는 빈껍데기를 빌려 쓴 듯 함부로 놀리는 몸놀림. 악마다.

시작된다.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 “썅! 언 놈이랑 붙어먹은 거야? 알지? 너넨 알 거 아니야? 연락하고 있잖아! 다 똑같은 년들. 썅!”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날도 이 지랄 맞은 레퍼토리로 시작했었지. 종일 쏟아부은 눈이 집 앞을 차갑게 덮었었지. 핏기 없이 새하얀 게 꼭 죽은 듯이 얼었던 길이 어스름녁엔 서슬이 퍼런 독기를 품는 것 같았지. 그 길을 따라서 소리가 들렸지. 쿵! 쾅! 쿵! 쾅!

“내가 모를 것 같아? 썅! 다들 한통속인 거! 니들도 나가! 따라갈 거면 가라고! 나가라고! 안 나가? 쥐뿔도 없는 것들이 지랄이야, 지랄이! 썅!” 가만히 있어야 해. 콩콩대는 심장도 멈춰야 해. 어떤 걸로라도 거슬리게 하면 안 돼. 그랬다간 어린 우리들을 죽일 거야. 물어보는 게 아니야. 취조지. 걸려들었다간 뼈도 못 추려. 가만히, 조용히, 죽은 듯이 기다려. 몇 시간이면 끝날 테니. 그날 봤잖아. 대거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눈길 위의 쿵! 쾅! 쿵! 쾅! 소리가 멈추더니 길가로 나있던 방문이 확 젖혀졌지. 물어뜯을 것을 찾던 그 눈. 지옥불로 끌고 가고야 말겠다는 듯이. 좁은 방구석 한 귀퉁이에 몰렸던 어린 우리들. 그리고 오직 하나의 표적. 엄마. 턱이 덜덜거리도록 다문 입,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손톱으로 꽉 쥔 주먹. 엄마는 그를 향해 앉았었지. 어린 우리들을 등 뒤에 감춘 채로.

“언놈이야? 야이 썅! 내가 모를 것 같아? 썅!” 고래고래 불을 뿜더라고. 그럴 땐 가만히 있었어야지. 입을 틀어막아도 모자랄 판인 걸 알았잖아. 어떤 말을 해도 그가 듣고 싶은 대로 곡해해서 듣는 걸. 엄마도 참, 거기다 어쩌자고 말을 섞었어? 찰나였지. 순간 그 손에 희번떡허니 부엌칼이 들린 게. 망난이. 그래 망난이가 따로 없었지. 살기. 오직 살기만 가득했어. 웅크린 몸으로 모든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우리들. 동생은 아랫도리를 적시고 말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우당탕탕 엄마가 맨발로 달아나자 지그재그 갈지자로 그도 튀어 나갔지. 어린 우리도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지. 그런데 그러면 안 돼. 어린 우리들이 따라가면 엄마가 날래게 도망갈 수가 없으니까. 엄마를 위해서 어린 우리들은 남겨져야 했지. 어린 우리들에게 등을 대줄 사람이 멀어지는데도 덩그러니 있어야 했어.

취했기에 망정이었지. 길이 얼었기에 다행이었지. 휘청거리는 그를 얼음길이 단번에 잡아 눕혔지. 그가 미끄러지더니 길 옆 깊은 도랑에 처박힌 거야. 옴짝달싹 못하도록 말이야. 휴ㅡ 끝난 거야. 선홍빛은 그 어디에도 튀지 않았어. 정말 다행이었지. 그리고는 그곳에 눈이 내렸어. 자꾸자꾸 쌓였지. 어린 우리들의 울음소리를 싹 다 흡수하면서 내렸고 그리고 쌓였어. 그렇게 의처증은 끝이 났어. 그 뒤로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거든.

하지만 그다음부턴 우리가 표적이 되었다. 새벽마다 취조를 당하는 거다. 몇 시간을 뜬 눈으로 경청해야 했다. 안 그랬다간…… 희번떡! 졸아서도 안 되었다. 허벅지를, 손등을 꼬집고 비틀었다. 듣고만 있으면 됐다. 아무런 토를 달지 말고. 그러면 끝이 있긴 있었다. 등교하기 전 한두 시간은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그는 내 생각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준인 나와 너무 다르다. 내 생각에 우리들은 보호받아야 할 어린 우리들이었다. 내 생각에 엄마는 가정에 있어야 했다. 내 생각에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집이어야 했다. 그는 이 세 가지를 이행했어야 함에도 의무를 저버렸다. 뿐만 아니라, 파괴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규칙은 규칙이다.

벌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이 세상에서 영구히 제거하는 것. 그런데, 그가 그걸 소중하게 여기기나 했나. 내가 행여라도 잘못짚은 거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므로 신중해야 한다. 나의 선택과 결정에 확신이 없을 땐 보편성을 따르면 된다.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그에게 소중한 것. 아내가 떠난 뒤에 그 혼자서 애지중지 여겼다며 착각하고 있는 그것. 오직 그만의 착각인 그것.

자, 선고한다. 그가 사랑하는 나는 그에게 헌사할 수 있는 기쁨의 정점인 대학 합격의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내 목숨을 끊도록 한다. 땅! 땅! 땅!(모두가 술 때문이었다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언니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