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에 대한 복수

<어스>(2019)

by 김현욱

월가 점령시위(Occupy Wall Street) 직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지금까지 누릴 것을 누리며 살아온 중산층과 상류층에 대한 하류층의 복수가 그려진다. 고담시의 법과 질서를 무너뜨린 악당 베인에게 선동당한 하류층은 상류층의 재산을 빼앗고, 인민재판을 통해 상류층에게 엉터리 판결로 복수한다. 확대되는 빈부격차에 대한 불안을 그린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예언은 4년 뒤 트럼프 당선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반 득표수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에게 뒤졌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지역이었던 러스트 벨트가 돌아섰던 것이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세계화로 인해 낙후된 지역인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이 민주당 대신 트럼프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조던 필 감독의 <어스>는 트럼프 이후에 가시화된 하류층의 복수를 그리고 있다.


조던 필은 흑인들의 육체를 백인들이 강탈한다는 설정의 영화 <겟 아웃>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감독이다. 화제가 된 이 영화를 보고 기발한 설정을 밀어붙이는 능력에 감탄했지만, 한편으로 서서히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영화의 비밀이 밝혀진 이후로는 급격히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어스> 역시 비슷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흑인과 백인의 관계를 다룬 <겟 아웃>과 달리 <어스>는 하류층과 중산층/상류층의 빈부격차를 다루고 있다.


<어스>에서는 어느 날 지하에 살고 있는 복제인간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자신들의 분신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지하에서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고 살던 지하인들이 지상으로 올라와 복수를 한다는 설정은 중산층/상류층에 대한 하류층의 복수를 상징한다. 주인공인 애들레이드와 게이브 부부는 흑인이지만 (구체적 직업은 밝혀지지 않지만) 캘리포니아의 숲 속에 별장을 가진 중산층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부부의 친구인 백인 조시 부부 역시 그야말로 상위 1%에 해당하는 상류층이다. 반면에 이들을 공격하는 지하인들은 아무런 물질적 자원조차도 주어지지 못한 이들로 그려진다.


지상과 지하의 대비는 두 개로 분단된 미국을 나타낸다.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해 지하인을 대표하는 레드는 자신들을 "미국인(Americans)"이라 말한다. 제목인 <어스(Us)> 자체가 미국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겟 아웃>에서 그렇지만 사회적 균열의 문제를 기발한 설정으로 변환시켜 그려내는 재주에는 감탄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는 이 분열된 자아로 나타난 두 계급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하류층에 의한 일방적 살육으로 끝나게 될까?


흥미롭게도 영화에서는 지상인들과 지하인들의 차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그려낸다. 관객들은 지하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살육에 타자의 공포를 느끼지만, 관객들이 감정 이입하는 주인공 가족 역시 생존을 위해 지하인들을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한다. 특히 주인공 애들레이드가 자신의 지하인 분신 레드를 죽이는 장면은 과연 그녀가 지하인과 다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게끔 만든다. 결말에서 밝혀진 반전은 애들레이드가 원래는 지하인이었으나 지상으로 탈출해 분신의 자리를 가로챘다는 것이었다. 이는 하류층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산층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개천에서 난 용'을 연상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미국인 관객들은 미국사회의 분단된 현실을 직시하고 영화 속의 '지하인'으로 그려지는 하류층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스>는 중산층/상류층의 주의를 끌게 하기 위해 하류층을 어떠한 이성적 대화도 불가능한 살인귀와 같은 존재들로 그려내고 있다.


아카데미상에서 한국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고 한다. <기생충>은 반지하에 살고 있는 하류층 가족과 상류층 가족의 빈부격차를 그린 영화라는 점에서 <어스>와 비슷한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아카데미상이 <기생충>에 주목한 것은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의 분열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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