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총기규제를 못하는가

<미스 슬로운>

by 김현욱

얼마 전 보 버넘 감독의 <에이스 그레이드>를 봤다.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소녀 케일라의 일상을 그린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중학교에서 대처 훈련을 한다. 그만큼 미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위험한 상황임이 드러난다.


그럴 만도 하다. 영어판 위키백과에서 미국의 총기난사 사건 리스트를 보면 끝도 없는 사건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ss_shootings_in_the_United_States) 특히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이후의 총기난사 사건은 심하다. 2017년 10월 1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었던 총기사고는 범인을 포함해 59명이 사망한 역대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된다.(그 이전까지의 기록은 50명이 사망한 2016년 6월의 플로리다 올랜도의 나이트클럽 사건이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선거전을 벌이던 시기에 성소수자 클럽을 대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밖에 2017년 이후 10명 이상이 사망한 총기난사 사고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2017년 11월 5일 텍사스 제일 침례교회 사건(범인 포함 27명 사망)

2019년 8월 3일 텍사스 월마트 사건(22명 사망)

2018년 2월 14일 플로리다 마조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교 사건(17명 사망)

2018년 11월 7일 캘리포니아 벤추라 술집 사건(범인 포함 13명 사망)

2019년 3월 31일 버지니아 비치 사건(범인 포함 13명 사망)

2018년 10월 27일 피츠버그 시나고그 사건(11명 사망)

2018년 5월 18일 텍사스 산타페 고등학교 사건(10명 사망)

(https://en.wikipedia.org/wiki/Mass_shootings_in_the_United_States, https://namu.wiki/w/%EC%B4%9D%EA%B8%B0%20%EB%82%9C%EC%82%AC%20%EC%82%AC%EA%B1%B4?from=%EC%B4%9D%EA%B8%B0%EB%82%9C%EC%82%AC%20%EC%82%AC%EA%B1%B4#s-5.2)


특히 2018년에는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수십만 명의 10대들이 총기규제를 호소하며 집회를 벌여 큰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미국은 왜 총기규제를 하지 않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벌어지지만, 실제로 규제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처럼 전면 금지는커녕 판매 요건을 조금이라도 강화하는 것조차 어렵다. 일단은 독립전쟁 이후 정부에 대한 저항권의 일종으로 무기를 가질 권리를 중시하는 미국의 문화를 이유로 들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한 이익단체인 NRA(전미총기협회)의 로비야말로 총기규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라 할 수 있다.


1994년,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한다. 당시 이슈가 된 문제는 이른바 3G라 불린 God(공립학교의 예배 허용 문제), Gay(동성애자 군 입대 문제), 그리고 Gun(총기규제)이었다. 이후 이 문제는 민주당에게는 건드려서는 안 될 터부가 되었다. 이 중에서 Gay에 관해선 동성애자의 군 입대는 물론 동성결혼까지 허용되었지만, 총기규제는 진전이 없다. 막대한 자금과 동원력을 가진 NRA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진보파들은 패배감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익단체의 로비 때문에 매번 지다니. 영화에서라도 로비로 총기 규제를 성공시켜보자라고 대리만족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일까? 존 매든 감독의 <미스 슬로운>은 총기규제를 둘러싼 로비스트들의 혈투를 다루고 있다. 승률 100%를 자랑하는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은 거대 로비회사에서 거대기업을 위해 로비를 펼치던 승부사다. 그러던 어느 날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로비를 하라는 의뢰에 반발하여 회사를 그만두고, 총기규제를 추진하는 소규모 로비업체로 이적한다. 슬로운은 갖가지 전술전략을 구사하며 총기규제 법안 입법을 위한 로비를 진행한다.


만약 미국의 총기규제 찬성파라면 이 영화를 보며 쾌재를 부를 만한 사이다 서사다. 주인공 슬로운은 총기 규제를 성공시키려는 전략을 입안하며,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그녀의 전략대로 진행된다. 통쾌하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도 과연 정말 그렇게 슬로운의 생각대로만 세상이 돌아갈까?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쓰면서 제갈량이라는 천재적 전략가를 창조했다. 제갈량은 적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 거의 매번 승리한다. 하지만 소설 속 제갈량의 전략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통하리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갖가지 전술전략을 통해 통쾌하게 승리하는 슬로운의 이야기는 혼자서 두는 체스 같은 느낌이다. 당연히 혼자서 두는 체스에서 항상 이긴다. 혼자서 두던 체스에서 백전백승을 하다가 실제로 체스 고수와 맞붙게 된다면 이길 수 있을까? 총기 규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영화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들과 부딪혀야 할 것이다. 영화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킨다. 그러한 단순화가 때로는 관객들에게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 패배하기만 하는 미국 진보파가 픽션 속에서나마 승리하는 이야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총기규제를 원하는 진보파의 대리만족 서사로 본다면 <미스 슬로운>은 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물론 현실이 영화 같은 사이다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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