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마지막 싸움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

by 김현욱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하버드대학 로스쿨에 입학한 1956년부터 1970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긴즈버그(펠리시티 존스 분)가 하버드대학 로스쿨에 입학한 당시에는 신입생의 대부분이 남자였고, 학장은 신입생 축사에서 신입생들을 "하버드 맨"이라고 부르며 "he"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 하버드대학에서 고리타분한 편견과 싸우고, 암투병 중인 남편을 따라 콜롬비아대학의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긴즈버그는 로펌에 취직하는 데 실패하고 법학 교수가 된다.


1970년, 루스의 남편 마티(아미 해머 분)는 찰리 모리츠가 노모를 부양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세금 공제를 받지 못한 재판을 루스에게 알려주고, 두 사람은 법률의 성차별을 무너뜨리기 위해 재판을 시작한다. 교수로 일하며 재판 경험이 없었던 루스는 고전을 거듭하지만, 결국 재판에 승리하고 이후 미국의 성차별적 법률들을 차례로 개정하는 위업을 세운다.


루스 긴즈버그가 역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노모를 부양한 남성 찰리 모리츠의 사례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직장에서 일하고 여성은 가정에서 일하는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속에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긴즈버그가 쓴 취지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Fair and equal treatment for women.

Fair and equal treatment for men.


성차별은 여성을 위한 것과 동시에 남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성차별의 법률을 조사하던 긴즈버그의 학생들은 여성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건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한 여학생이 말하자 다른 여학생이 "하지만 그것도 차별이야"라고 말한다.


루스 긴즈버그의 싸움은 남성을 적대시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 마티는 그녀의 싸움의 동반자였다. 마티가 루스에게 찰리의 사례에 대해 알려주거나 재판 내내 믿음을 주지 않았다면 루스가 재판에서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평등의 문제가 남성vs.여성의 단순한 대립구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말미에서는 이후의 긴즈버그의 행보가 자막으로 짤막히 소개된다. 1993년, 긴즈버그는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 유대인으로서는 첫 번째로 연방대법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2020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현역 연방대법관으로 재임 중이다.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바마케어, 동성결혼, 이민, 낙태 등에 대한 문제가 연방대법원에서 결정된다. 나아가서는 2000년 미국 대선 투표 결과를 놓고 부시와 고어의 승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 역시 연방대법원이다. 21세기 들어 점점 첨예해지고 있는 좌우 대결에서 연방대법원은 정치적 주전장이 되었다. 긴즈버그가 임명될 당시에 상원에서는 96:3으로 동의를 얻었지만, 최근 트럼프 정권에서 임명된 캐버노는 50:48로 아슬아슬하게 동의를 얻었다.


연방대법관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다.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임명된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한 뒤, 두 명의 연방대법관을 임명했다. 오바마 정권 말기에 사망한 안토닌 스칼리아와 트럼프 정권 들어서 사임한 앤서니 케네디의 몫이다. 중도보수로 분류되며 캐스팅 보트를 맡아온 케네디의 몫이 보수로 분류되는 캐버노로 넘어가면서 연방대법원의 구성은 보수 5:진보 4의 구도로 굳어졌다. 트럼프가 임명한 두 명의 나이는 50대, 즉 앞으로 2-30년간은 보수와 진보의 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임기는 재선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4,5년 내로 끝나지만, 트럼프가 임명한 연방대법관은 2,30년 동안은 계속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공화당 지지자들 중에는 트럼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힐러리 클린턴이 스칼리아의 후임을 결정하는 일만은 막고자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30년이 지나도 구성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스칼리아처럼 돌연사하지 않는 이상, 대법관들은 사임할 타이밍을 선택할 수 있다. 보수 성향은 공화당에 정권에 돌아왔을 때, 진보 성향은 민주당에 정권이 돌아왔을 때 사임한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보수 5:진보 4 구도는 쉽게 뒤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진보파에게 가장 큰 악몽은 5:4를 넘어 6:3으로 바뀌는 일이다. 즉, 현재 87세인 긴즈버그의 건강 문제다. 암 투병력이 있는 긴즈버그는 2019년에도 암 수술을 했고, 올해 5월에도 입원하며 진보파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현재 87세인 긴즈버그의 마지막 싸움은 트럼프 정권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일일 것이다.


P.S.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로 긴즈버그는 2020년 9월 19일, 향년 87세로 영면에 들었다. 트럼프는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의 에이미 배럿을 후임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했다. 만약 트럼프가 세 명의 연방대법관을 임명하는 데 성공한다면, 재선하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미국사를 바꾼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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