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샷>(2019)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사퇴하면서 바이든이 사실상 민주당 후보로 결정되었다. 아마도 큰 이변이 없다면, 올해 있을 대선에서 바이든이나 트럼프 둘 중 한 사람이 당선될 것이다. 누가 이기든 70대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이성애자 남성이 대통령이 될 예정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도, 최초의 유대인 대통령도, 최초의 LGBT 대통령도, 최초의 아시아계 대통령도 탄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 유권자들의 선택인 이상, 그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한 힐러리 클린턴을 기억하자면, 이번 대선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퇴색된 느낌이 든다.
현실보다 한 발 앞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 <롱 샷>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롱 샷>의 주인공은 최연소 국무장관인 샬롯 필드(샤를리즈 테론 분)는 국정에 관심이 없는 대통령을 대신해 전 세계를 누비며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인물이다. 배우 출신의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샬롯이 차기 대선에 도전하게 된다. 어린 시절 그녀의 옆집에 살았던 플라스키(세스 로건 분)가 그녀의 스피치 라이터가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영화 속의 샬롯은 매력적인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유능하고, 뚜렷한 신념이 있고, 국민들에게 진실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최연소 국무장관으로 유능한 수완을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는 유리천장이 가로막고 있다. 샬롯의 보좌관은 그녀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92%라고 말하며, 만약 남자였다면 192%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대통령은 샬롯을 "비서(secretary)"라고 부르고, 샬롯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라고 정정한다. TV의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들은 그녀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다. 여성 정치인으로 부딪힐 수 없는 편견의 벽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국무장관은 지난 대선의 힐러리 클린턴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한국의 외교장관에 해당하는 국무장관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를 그려낼 수 있는 직책이라는 점도 영화의 설정에 큰 요인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트럼프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꿈이 깨진 클린턴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나마 재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최초의 흑인 대통령,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대통령 같은 타이틀이 가지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특정 후보가 대통령으로서 적합한가의 문제는 그가 어떤 선천적 속성을 대표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여자라서 트럼프에게 졌다는 것과 같은 입증되지 않은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혹은 박근혜가 여자라서 탄핵당했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샬롯의 감동적 스토리와 비교하면 현실에서 벌어질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결은 한층 재미없게 보인다.
<롱 샷>은 로맨틱 코미디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정치학도의 눈으로 보자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정치의 모습에 불만을 느끼게 된다. 정치인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는 적지 않지만, 대부분은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정치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정치를 둘러싼 대립만을 그린다. <롱 샷>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는 환경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이 주요한 이슈로 나오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영화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그려지는 것은 신념을 가지고 환경문제를 진전시키려는 샬롯과 플라스키가 정의이며,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악이라는 대립 구도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대부분의 정치 소재 로맨틱 코미디에서 비슷비슷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정치는 단순히 영화에서 갈등과 대립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고, 정치 그 자체의 의미를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는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아쉽다(물론 그런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는 나 같은 정치학도가 이상한 것이겠지만). 영화와 정치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로맨틱 코미디만큼은 정치와 궁합이 맞지 않는 장르인 것 같다. 그래도 정치의 의미를 잘 전달하는 로맨틱 코미디와 언젠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