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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아 Apr 04. 2016

오늘 비가 내린 이유

봄비

카톡! 카톡!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카톡 문자가 온다.

"당신, 혹시 어제 세차했니?"

"네, 정말 미안..오늘 당신 등산 간다는 걸 깜빡 했어요."


카톡!

"오늘  부모님 모시고 수목원 가는 길인데 하필 비가 오길래 너 때문인 줄 알았다. 하루만 참지 그랬어."


지난주 비답지도 않게  흙비가  내려서 온통 얼룩이 져버린 차를 보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모아둔 세차 쿠폰을 썼는데 이런.. 하필 주말이었네.


다들 꽃구경 간다고 너도나도 앞장서서 길을 나섰을 텐데  내 탓이 맞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늘, 아니 거의  백만 년 만에 세차를 하는데 하필이면 그때마다 주문에 걸린 것처럼 꼭 다음날은 오늘처럼 비가 내린다.


그래서 친구들과 지인들도 이젠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실이 되서 내일 중요한 일정이나 나들이 계획이 있으면 일기예보를 믿기보다는 마치 내가 비를 주관하는 인물인 것처럼 나에게 전화를 한다.


" 혹시 세차하고 싶거든 오늘은 하지 마, 나 내일 애들 데리고 놀이동산 갈 거야."

" 오늘 세차하고 싶어도 참아줘, 내일 모임에서 북한산 갈 거야."


허락도 안 받고 난 어제 세차를 해버린 거다. 그래서 오늘 나들이 계획이 있었던 친구들 원망을 들어도 싸다.


이러니 세차 좀 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변명 같지만  더 세차를 안 하기도 못하기도 한다는게 나름 이유있는 나의 변명이다. 하지만 왜 가뭄엔 효과가 없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 요즘 너무 가물어서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지는데 비 좀 시원하게 내릴 수 있게 얼른  세차 좀 해" 하는 주문을 아무리 받아도 이상하게  그럴 땐 아무런 힘이 안되더라.

 아마도 목적을 가지고 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한 나쁜 쪽으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오늘 아침 고교 동창들과 어울려 관악산에 올라간 내 룸메이트를 향해 "휴일인데 같이 강아지 산책 좀 시켜주고  집안일 좀 거들면 안 되나? 내일 산꼭대기 올라가면 비나  확~ 와 버려라." 할 수도 있으니..


그래도..

그렇더라도..

오늘 다정하게 내리는 봄비가 늦잠자는 꽃들의 콧잔등을 두드려 기지개를 펴고 피어나게 할테니 그 꽃을 바라보며 눈 흘기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길..


그리고  내가 세차를 게을리한 덕분에 갈 곳 몰라 헤메던 불쌍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드디어 풀로 자랐다는 전설같은  얘기를 들으면 세차를 안 하기도 했지만 못하기도 했다는 걸 믿어줄 수 있을 거야.


삼월 초 갑자기 강원도에 출장이 있어서 하루 일정으로 급히 다녀와야 했었다. 군데군데 움푹 패인 구덩이가 있어서 피하지 못하고 몇 번 첨벙거리며 밟았다가 진흙이 차에 튀었었다. 어차피 더러워진 거 주말에 세차를 하려고 마음먹고 며칠을 그냥 타고 다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보니 자동차 앞문과 뒷문 사이에 뭔가 실 같은 게 삐죽하게 나와있길래 뭔가 하고  다가가서 자세히 봤다.


"세상에, 내 차에서 풀이 자라고 있었다니.."


언뜻 보면 열무의 첫 이파리처럼 생겼다.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기특하게도 어떻게 내차에 묻어있는 흙을 눈치채고 따라왔을까?

퇴근길에 세차를 하려고 했었는데 몰랐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악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살아보겠다고 찾아와 둥지를 틀었는데 어쩌겠는가?

한동안 같이 살아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주행 중 속도가 나면 바람에 뿌리가 뽑혀서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서 휴지로 덮고 테이프로 감싸주었다. 세차를 할땐 비닐팩으로 완전히 비닐하우스처럼 막아주기도 하며 우린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다.


 나중에 후회가 됐던 건 왜 좋은 곳에 옮겨주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아마도 잘못 건드렸다가 톡 하고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손을 대볼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며칠간은 엉뚱한 상상으로 즐겁기도 했었다. 혹시 재크의 콩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서 내차를 온통 초록으로 뒤덮고 여름엔 시원한 나무그늘이 되어주고 가끔 새도 날아와서 알을 낳고 매미도 울지않을까 하면서..


그런데.. 내 초록이는 열흘도 안돼서 그만 시들해지더니 잎이 또르륵 말리고 바짝 말라갔다. 아침저녁 생수도 몇 방울씩 뿌려줬는데 역시 흙에서 빨아들이는 양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매일 차로 이동을 해야 하니 멀미를 하진 않을지 걱정했지만 정작 흙을 더 보태줄 생각은 못했었다.  아쉽지만 짧았던 인연의 끈을 놓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어쨌든 더 이상 세차를 못할 이유는 없어져서 오랫만에 켜켜이 껴입은 두꺼운 흙먼지를 말끔히 씻어냈는데 충청권에만 오겠다던 비가 서울, 경기지역까지 골고루 내려줬다. 그리고 그 원성은 모두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봄비 덕분에 벚꽃이 더 활짝 피었는데 그 말은 쏙 뺀다.

 4월 한 달 꽃놀이 철엔 더 이상 세차는 못 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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