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여행의 마지막 날(1)
아침부터 버스가 오지 않았다. 날씨도 화창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뜬 시간은 계속 변동되더니 결국 버스가 올 수 없다고 알렸다. 현지인들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악센트의 외국어는 쳐다보고 있자면 귀엽게 들리기도 한다. 인종을 불문하고 불평하는 어투가 똑같기 때문이다. 시누이는 한참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아무래도 다음 정류장으로 가봐야겠다고 했다. 파업 때문에 버스 시간이 좀 달라지는 것 같다고. 다음 정류장, 그 다음 정류장으로 가 봐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였고 아무도 답을 찾지 못하자 우왕좌왕 했다. 이런 시트콤 같은 아침이라니.

둘째가 계속 장염이 낫지 않자 남편이 하루 간호를 하기로 했다. 큰 딸 덕이다. 엄마가 파리에 와서 에펠탑을 못 보고 가는 게 말이 되냐며 아빠가 동생을 보살펴달라 한 것이다. 다행히 둘째 컨디션도 나아지고 있어서 좀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다. 며칠 지났다고 근처가 이제 익숙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발걸음도 신이 났다. 그 파업 사태를 맞이하고도 ‘역시 파리지’ 싶고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내일이면 파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운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는 모든 교통편 예측이 꽤 정확하다. 인터넷 설치나 이사 서비스 등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르고 친절하다. 고풍스러운 모습의 파리는 서비스들조차 아날로그적이었다. 그런 파리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내는 출발이 버스 파업이라니 딱 어울리지 않는가.
택시를 탔다. 시누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투어가이드처럼 설명해 주었다. 소르본 대학, 각종 공공기관들, 오페라 가르니에를 택시 안에서 지나가며 구경했다. 이쯤 되면 ‘럭키비키’다. 파업 덕에 택시 투어. 오히려 좋았다. 센 강변 주변으로 길게 늘어선 부키니스트를 발견한 건 덤이었다. 부키니스트는 초록색 가판대에 헌책, 고서적, 엽서 등을 늘어놓고 파는 헌책 노점상들을 말한다. 연필 스케치처럼 단순한 센 강 배경에 초록 물감을 칠한 듯, 붓이 지나간 자리처럼 툭툭 늘어선 가판들이 어쩜 그리 잘 어울리던지.
16세기에 조성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프랑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이곳이 프랑스 올림픽 때 철거당할 뻔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우리나라의 청계천 헌책방 노점들이 생각났다. 복개공사로 인해 지금은 평화시장 근처로 다시 헌책방으로 문을 열었다지만 당연히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 집 근처에도 ‘서울 책보고’라는 곳이 있다. 원래 국내 최초 공공헌책방이라는 모토를 걸고 야심차게 시작했으나 온라인 중고거래 등에 밀려 결국 최근에 문을 닫았다. 다시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팝업 전시나 북 카페, 일반 도서를 구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로 단장한다고 하는데 헌책방의 역할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를 품는 유럽 사람들의 전통이, 프랑스의 문화가 참 부러운 날이었다.
한참을 달려 라파예트 백화점에 도착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기로는 이 곳도 만만찮다 싶었다. 고풍스럽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백화점 건물들안에 수많은 현대적인 브랜드들이 모여 있었다. 각각 남성관, 여성관, 식품관 세 건물로 나뉘어 있는데 일단 배고픈 우리들은 식품관으로 직행했다.
지중해식 식당에서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반해버린 나는 그 식당에서 파는 무거운 올리브유를 사들었고, 큰 딸은 친구들과 먹겠다며 꿀타래처럼 새긴 디저트를 잔뜩 샀다. 유명한 마카롱가게나 케이크집들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지만 다 먹다간 해 저물도록 여기서 못 빠져나갈 것 같았다.
여성관에 잠시 쇼핑을 하러 들렀다. 프랑스 드라마, ‘뤼팽’에서 주인공의 와이프가 쫓기던 그 배경이다. 꽉 들어찬 화장품 브랜드들 사이로 고개를 들면 화려한 천장의 무늬가 마치 박물관 천장의 그림들처럼 펼쳐져 있다. 우리뿐 아니라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라파예트 백화점 하면 딱 떠오를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각 층을 테라스처럼 만들어 지상을 내려다 보이게 만든 게 꼭 오페라 하우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전을 잘 품은 현대적인 아우라의 표본이랄까. 쇼핑센터에 오면 흥분하는 상당히 보편적인 지병이 있는 나는 라파예트 백화점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더 가슴이 뛰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만성방광염 환자에게는 쇼핑보다 화장실 위치가 중요한데, 라파예트 백화점 여성관의 화장실은 6층 한 군데 밖에 없다. 층층마다 두어 군데씩 화장실을 지어놓은 한국식 백화점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아니, 이 백화점 직원들은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어떡하지? 온갖 오지랖이 발동했다. ‘이 백화점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프랑스라지만 백화점에 화장실이 한 개? 민원 넣을 감인데?’, ‘위생 상태 장난 아니겠구나.’, ‘사람들은 이 불편한 파리에서 어떻게 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파리는 파리였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층을 다 화장실로 만들어놨을 줄은 몰랐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마냥 널찍한 공간에 화장실을 수십 칸 지어놓았던 것이다. 줄 설 것도 없이 편안하게 일을 볼 수 있었다. 파리는 식당을 가건 박물관을 가건 화장실을 아래층이나 위층으로 몰아놓는 문화라는 걸 이번 여행에서 배웠지만, 백화점까지 이렇게 한 층으로 지어놓았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시 평생을 배워도 여행은 또 배울 거릴 던져준다.
6층에는 시원한 화장실만큼이나 사방이 확 트인 루프탑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손가락 하나로 잡을 수 있었다. 파리 전체가 한 눈에 보였다. 장관이었다. 21세기에 이런 옛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화를 볼 수 있다니. 한참 사진도 찍고 시원한 바람도 쐬었다. 라파예트 백화점은 파리의 물건 뿐아니라 감성도 같이 가져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불편함과 멋짐을 밀당하듯 하나씩 내어놓는 파리. 달콤한 마카롱과 씁쓸한 초콜릿을 교대로 맛보는 기분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또 어떤가. 화장실이나 버스가 불편했던 것과는 다르게 쇼핑을 하거나 박물관을 돌면서 만났던 이들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진한 관심을 표하고 또 파리에 놀러오라며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어느 쪽이 진짜 파리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두 모습을 다 간직한 파리여서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고, 불편함과 친절함을 동시에 간직한 곳. 그나저나 나도 파리에서 마침내 진짜 에펠탑을 보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붙들고 나는 트로카데로 광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 어김없이 돌아온 환자를 위한 팁!
1. 라파예트 백화점에는 6층 말고 화장실이 한 군데 더 있다. 1층에 ‘라뒤레(Ladurée)’를 들르면 된다. 마카롱과 각종 케이크들로 유명한 곳. 라뒤레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레스토랑 손님은 이용할 수 있다. 운 좋게 잘 이용했음.
2. 라파예트 백화점 6층에는 기념품 샵들이 많다. 우리 몸이 힘든 환자들은 한 곳에서 원스톱 쇼핑이 편리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는 비싸게 파는 잼이나 버터, 초콜릿 종류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으니 꼭 들러보길.
3. 쇼핑 후 택스리펀도 1층 샤넬 매장 옆에서 할 수 있으니, 라뒤레에서 당을 좀 섭취한 뒤 화장실 갔다가 느긋하게 가시길. 여권과 영수증 지참해서 기계에서 간단히 신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