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는 일시정지가 없습니다만
영화 <터미네이터2>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미래의 인공지능 시스템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자 그 계획을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온 T-800이, 자신 또한 그 위험인자임을 인지하고 스스로 용광로에 내려가며 자멸하는 그 유명한 장면 말이다. 그동안 자신을 의지했던 어린 존이 울며 가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학습한 그는 마지막까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꾹꾹 삼키다 결국은 꺼이꺼이 울었다. 1991년이니까, 내가 중3때였다.
나는 그날 스크린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궁금하지도 않은데, 학교에서 굳이 문화생활을 시키겠다며 단체로 끌고 가서 3시간을 개운하게 자고 나온 때와는 완전 달랐다. 터미네이터가 죽던 그날은 영화관 안 모두가 울음바다였다. 존과 사라의 충직한 부하이자 가디언이었던 터미네이터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던 순간을 30년이 훌쩍 지나도록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다니, 역시 영화관에서 받는 감동은 오래간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무엇보다 전염성이 있었다.
감동의 전염성은 사실 익명성을 담보로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옆에서 훌쩍거리면 나도 함께 슬퍼져도 될 것만 같다. 영화 <편지>에서 박신양이 죽어가며 비디오에 영상 편지를 담은 장면에서는 체면도 없이 오열을 해서 옆자리 남모르는 남자와 휴지를 나눠 쓴 기억도 있다. 웃음도 마찬가지다. 영화관에서 영화 <스물>을 보다가 너무 웃겨서 나중에는 눈물까지 났는데, 나중에 집에서 우연히 다시 보니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던 희한한 경험도 해 봤다,
영화관은 여전하다.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진화했다. 좌석도 없이 표를 끊고 들어가 아무데나 앉아보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돈만 더 내면 리클라이닝 기능에 핸드폰충전 기능까지 있는 좌석에 신발을 벗고 편히 볼 수도 있다. 빈백에 누워서 보면 더 편하다. 나는 영화, <오펜하이머>를 그렇게 거의 누워서 두 번 봤는데, 두 번 다 코를 골고 푹 자고 나온 유경험자다. 그 뿐인가. 한 영화관에 영화 하나만 상영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멀티플렉스 공간 안에서 여러 영화를 입맛대로 골라볼 수 있다. 점점 몸집을 불려가니 그 안에 식당과 쇼핑센터까지 다 들어왔다. 원스톱으로 하루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사람들은 예전보다 영화관을 덜 찾는다. 일단은 표 값이 문제다. 4인 가족이 영화 한편 보려면 할인 없이는 6만원이 든다. 할인을 받아도 팝콘에 이것저것 사서 들어가면 웬만한 외식비용이 뚝딱이다. 코로나로 인해 관객 수가 줄자 어쩔 수 없이 표 값을 매년 올렸기 때문이다. 이해는 가지만 부담은 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영화를 덜 보느냐? 아마 사람들은 예전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말이다. 거기에 티빙, 웨이브, 디즈니플러스 등,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장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유선 인터넷이나 데이터, 혹은 저장 공간만 있으면, 이젠 비행기에서도 OTT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영화관에 걸린 영화가 OTT로 오기까지 짧게는 한 달이 채 안 걸리기도 한다. 한 달에 만 원 남짓으로 스트리밍 되는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이쯤 되면 ‘왜 영화관을 굳이 가야 하는가?’ 싶다.
심지어 영화관에는 일시정지 버튼이 없다. 화장실이 급하면 참든지, 아니면 영화의 맥락이 끊어지는 상황을 감수하고 뛰어나갔다 와야 한다. 나가다 팝콘이나 콜라를 쏟기도 하고, 옆 사람들의 언짢은 소리도 감내해야 한다. 반대로 집에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면, 전화가 와도 받을 수 있고, 설거지를 하며 볼 수도 있다.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일시정지하면 그만이고, 졸리면 내일 봐도 된다. 재미없으면? 바로 끄면 그만이다. 일주일동안 나눠 보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반납해야 하는 비디오테이프도 아니지 않은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이유로 영화를 꾹 참고 보는 일이 줄었다. 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앞에 넣어서 계속 보도록 유도하는 스토리가 판을 친다. 영화관 표 값이 아까워서 끝까지 보다가 뒤늦게 명작임을 발견하는 영화는 OTT시장에서 크게 인기가 없다. 영화 <그을린 사랑>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보다보면 끝 장면에 와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영화는 추천하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은 누워서, 영화 앞부분 10분을 보고 더 볼지 말지 판단한다. 다시 다른 영화를 틀어보고, 또 찾아보다가,,,그렇게 잠이 든다. 영화는 분명 2시간짜리 예술인데, OTT로 넘어오면 10분짜리 자장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광화문 씨네 큐브에서 영화 <벌새>가 끝나자 한참을 먹먹해서 눈물을 흘렸던 날을 기억한다. 앞부분은 살짝 지루했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날 관객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영화라는 게 무색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던 시간동안, 그 몇 명 되지 않는 관객들은 모두 감동에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지도 모를 저 끝에 앉아있는 사람도 나와 같은 감동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과 마음은 연결됐다. 알 수 없는 우리 사이의 공감은 작은 훌쩍임만으로도 그 좁은 극장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우리집 둘째는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그녀의 절친 아버지가 제발 이 판에 발도 디디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극장에 영화를 걸고 성공하는 게 쉽지 않은 시대다. 영화관 숫자 또한 줄어들고 있다. 몇 백억 대작 오락 영화도 파친코 기계처럼 일단 돌려봐야 안다. 관객숫자에 따라 손익분기점을 넘어가느냐 마느냐 조바심을 내다 재빨리 막을 내리곤 한다. 나는 <대도시의 사랑법> 영화가 너무 좋아서 평일 오후에만 3번을 보러가기도 했다. 이런 영화들이 이 치열한 틈바구니에서 계속 살아있기를 바랬다. 평일 오후의 영화관을 들러보면, 텅텅 비어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에 비친 주인공들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자. 감정이 미세한 이마 주름 사이로도 들여다보인다. 그러면 그들의 희로애락은 내 인생과도 연결이 된다. 그리고 옆에 앉은 너와 내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 함께 탄식을 내뱉거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다 함께 빵빵 터지며 웃는 그 순간들이 모여 그 두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 아니 그 전에, 그날의 날씨, 타고 온 버스 창가의 바람, 금방 튀긴 팝콘의 향까지 다 버무려지면서 영화는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함께 영화에 대해 대화하며 걸어 나오는 사이좋은 발자국 소리까지 합쳐져서 비로소 영화는 완성된다. 그렇게 영화는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