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인가, 추억인가.
나는 18년 된 아파트에 산다. 처음부터 나이든 아파트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이곳은 깔끔하게 재건축된 새 단지였다. 주변은 모두 30년 이상 된 키 작고 오래된 아파트들이어서 우리 아파트는 혼자 날렵한 턱시도를 빼입은 듯 위풍당당하게 솟아있었다. 단지크기도 커서 초등학교를 2개나 품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나이 들지 않을 것 같은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파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 곳에 사는 나의 속마음이었다. 그사이 기어이 세월은 흘렀고, 주변 아파트 두 곳이 기나긴 재건축을 끝내고 곧 화려한 입주를 시작한다. 바로 내일부터다. 이제 내가 사는 아파트는 인근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되어버렸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건 내 얼굴뿐이 아니었다. 우리 아파트는 그동안 주변 아파트들보다 높은 시세를 자랑했었다. 지금은 아직 입주도 시작하지 않은 그 곳들보다 몇 억은 낮은 시세에 거래되어 애꿎은 부동산 사장님들만 아파트 주민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다. 가격 동반상승을 기대하고 낡은 아파트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지하주차장 바닥에 도장도 다시 했는데, 시세가 영 시원찮다. 마치 나이 먹은 건 생각 않고 왜 광대뼈 아래 팔자주름은 심해지는지, 먹은 것도 없는데 턱 밑에 살은 자꾸 붙는지, 투덜대고 있는 중년의 내 모습 같다.
벌써 재건축을 한 번 거친 우리 아파트도 언젠가 다시 재건축을 하게 될까? 그러면 이번에 입주하는 저 아파트들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될까? 상상을 해 봤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대로 재건축 사업도 이미 양극화의 길에 들어섰다. 사업성이 있으려면 점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층아파트를 지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공사비와 그에 따른 분담금은 높아진다. 그걸 부담할 수 있는 강남 같은 지역은 점점 비싼 아파트를 짓겠지만, 변두리로 갈수록 그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고 한다. 그러면 점점 고령화된 아파트는 다시 지어지지도 못한 흉물이 된 채 버려질 지도 모른다. 끔찍하지만 이 아파트도 그리 될지 모르는 것이다.
아파트는 경제적 재화(財貨)가 된지 오래다. 상품성이 높은 데다 도시의 중심부로 갈수록 가격이 치솟는 아주 특별한 재화다. 서울 아파트는 이제 그냥 투자재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 흐름 한 번 잘못 탔다가 정신과 상담 받는 지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자, 이렇게 인서울 대학도 아니고, 인서울 아파트 편중현상이 심해지면 나중에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 전문가들은 높고 길게 뻗은 고급 아파트들 사이에 재건축되지 못한 나이든 아파트들이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진을 제시한다. 앞으로 한 30년쯤 지나면 이제는 돈이 없어서 재건축을 못하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재건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아파트 사업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이 브런치북 13화, ‘동전이 희미해진다.’에서 어린 내가 심부름하며 오르내렸던 계단이 있는 그 아파트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자리 잡고 있던 그 아파트를 검색창에 지도를 뒤져 찾아냈다. 놀랍게도 1979년에 지어졌음에도 아직 재건축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46년 전에 지어진 곳이다. 정말 낡았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사업성이 있어야 재건축에 들어갈 텐데, 그렇지 못했던 걸까. 15분 정도 걸어야 버스정류장이 있던, 좀 불편하지만 대로변이 아니라서 오히려 조용했던 그 모습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게 반가웠다. 아파트 외벽만 밝은 색으로 칠해 낡은 세월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저 그런 모습이라도 좋았다. 여전히 굳건하게 있어줘서 고마웠다.
그 아파트는 장사하느라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나를 지켜주는 존재였다.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아니었다. 건물에 성을 붙여 구분할 수 있다면 아파트는 체격 좋은 남성이었다. 그 주변 양옥집들은 알록달록 지붕을 얹고 마당에 빨간 꽃을 가득 심은 다정다감한 여성이었고. 내겐 그랬다. 양옥집에 사는 친구들 집에 놀러갈 때면 삐 소리와 함께 열리는 대문 안 풍경이 참 아늑했다. 아파트는 그런 따뜻함은 없었지만 든든함이 있었다. 그렇게 그 당시 아파트는 다른 집 형태들과 마찬가지로 투자 가치가 아닌 정서적인 가치가 서린 곳이었다. 그저 다른 곳에 산다는 거지, 아파트에 산다고 다 부자도 아니었다.
아빠는 술을 좋아했다. 매일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밤 12시가 다 된 시각에 친구들을 집으로 몰고 왔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남편이지만, 엄마는 웃으며 그 손님들을 치렀다. 속 풀리라고 뜨끈한 국수를 삶고 맛난 안주거리를 뚝딱 만들어 냈다. 아빠는 내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좋아해서 자는 나를 깨워서 ‘개똥벌레’나 ‘바위섬’을 연주하라고 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피아노에 손을 얹었고, 그 어설픈 반주에 맞춰 아빠와 친구 분들은 신명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세상에, 지금 같으면 층간소음으로 경찰이 출동할 일이다. 그렇게 몇 곡을 치고 들어가 나는 다시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빠의 그 오래된 친구 분들은 내 피아노 연주에 제일 열광했던 관객들이었기에 나도 싫지만은 않았다.
내겐 그런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 아파트였음을 잊고 있었다. 그 아파트 사진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혼자 책을 읽고 숙제를 하던 내가 보였다. 엄마와 함께 콩나물을 다듬고 있던 내가 보였다. 친구와 같이 이불 덮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내가 말이다. 지금도 2000년대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 세대에게 아파트는 그런 추억이 서린 아늑한 공간이다. 그저 집이다. 다를 리 없다. 하지만, 재건축을 계속하며 그런 공간은 사라져 간다. 우리 아이만 해도 앞 아파트가 재건축되면서 유난히 벚꽃이 흐드러진 친구 집에 놀러가면서 꽃잎을 손에 잡아보던 추억이 사라졌다. 다시 지어진 아파트 나무에 꽃이 피어도 그 공간은 아닌 것이다.
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오래 걸린다. 그만큼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도 힘이 든다. 내 주변에도 25년을 기다려 이번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 아파트도 좋지만 그 사이에 조합장과의 싸움, 재판, 건설사들의 횡포에 지쳐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이제는 오래된 아파트를 고쳐가며 써야하지 않을까? 꼭 다시 지어야만 할까?
아파트는 상품인가, 추억인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새 아파트였을 때, 사실 나는 그게 좋아서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낡아서 난방배관은 해마다 고장이 나고, 현관카메라는 고장 났고, 시세는 떨어졌어도, 여전히 나는 이곳이 좋다. 나에게는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킥보드 타던 어린 나의 아이들과 함께 걷던 봄의 벚꽃 길, 밤하늘을 밝혀주던 목련꽃의 하얀 자태, 건너편 우체국 앞 꼬릿한 은행나무 냄새, 붉은 동백나무 위 내려앉은 하얀 눈을 털어 눈싸움하던 추억의 공간을 지우고 싶지 않다.
최근 ‘캐셔로’ 드라마에서 민숙이 깔깔대며 말한다. 밤하늘의 별과 서울 아파트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고. “엄청 많은데, 가질 수 없다는 거”란다. 사실 가지기도 힘든 서울 아파트들이 이렇게 재건축을 거듭하면서까지 계속 거대한 몸뚱이를 증식해야 하는가 싶다. 게다가 아파트는 우리 아이들 세대에는 이제 쉽게 들어갈 수도 없는 밤하늘의 별같이 먼 곳이 되어버렸지 않나.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무슨 돈이 있어서 나날이 비싸지는 이 아파트들을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이 많은 아파트들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