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소리
친정엄마는 ‘귤’을 ‘굴’이라고 발음하는 토종 경상도 할머니이다. 반면, 내 둘째딸은 ‘궁디’가 뭔지 모르는 서울 아이다. 서로의 말이 외국어라도 되는 듯, 둘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가끔은 손짓 발짓을 해야 둘의 입에서 “아...”소리가 난다. 고요속의 외침도 아니고, 아이는 입모양을 커다랗게 해서 또박또박하게 말한다고 하는데 엄마는 귀까지 어두우니, 둘이 애쓰는 걸 옆에서 보면 웬만한 개그프로보다 웃긴다.
몇 년 전 대구에 갔을 때다. 시장을 갔다 돌아오는 둘의 손에 센베이 과자봉지가 한가득이었다.
“얘가 센베이 먹고 싶다고 해서 내가 이마이 샀다 아이가.”
엄마가 뿌듯하게 말을 하는데, 둘째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엄마, 내가 이거 안 먹고 싶다고 했는데 외할머니가 끝까지 사주셨어.”
“니가 이거 먹고 싶다켔쟤?”
“아니라니까요.”
중재를 해줄까 말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밌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한쪽 귀가 안 들렸던 아빠 덕에 우리 친정식구들은 모두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아빠는 동양인은 잘 걸리지 않는다는 귀의 뼈가 굳어가는 병이 있었고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해야 했다. 성공적인 수술이었다지만 아빠의 귀는 다시 어두워졌고, TV소리는 다시 커졌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손짓을 써가며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게다가 엄마는 각종 소음에 노출된 시장에서 종일 일하다보니 큰 소리에 더 익숙해졌다. 안팎으로 큰 소리와 함께 한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귀는 아빠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바깥소리에 무뎌져갔다.
결국 엄마는 아빠의 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요즘 들어 귀가 더 어두워졌다. 그걸 여실히 느낀 건, 지난 달 엄마의 78번째 생일 무렵이었다. 난 엄마가 혼자 생일을 보내는 게 싫어서 올라오라고 부탁을 했다. 딸의 성화 덕에 나이든 엄마는 짐을 싸들고 혼자되고 처음으로 서울로 나들이를 왔다. 다행히 석촌호수에 단풍이 절정으로 물든 가을이었다. 평소에 엄마에게 사주려고 벼르고 있던 운동화도 사주고, 올림픽공원도 좀 돌며 단풍놀이도 하고, 생일상도 차리고, 각종 맛집도 데려가서 서울을 제대로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아빠 생전에는 워낙 아빠밖에 모르는 엄마였기에, 나는 한 번도 엄마랑 단 둘이 데이트를 하거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엄마를 그야말로 호강시켜 줄 각오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성당일과 친구들 일에 오지랖이 백만 평인 엄마를 내가 이길쏘냐.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친구와 서울역에서 만나 장을 봐서, 부천에 사는 몸이 불편한 친구네 집에 들렀다가, 또 강남성모병원에 진료가 있는 친구를 따라 같이 갔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잠실에 사는 우리집까지 왔다. 모두 전철을 갈아타며 말이다. 평생을 시장에서 장사하며 체력하나는 천하장사인 엄마임을 잊었다. 게다가 말도 참 안 듣는다. 사춘기 내 딸보다 더 양쪽 귀를 야무지게 닫은 듯 하다. 다리 아프니 택시를 타고 집에 올 때 분명 연락하라고 했는데, 못 들었다며 말도 없이 내가 마중 나가기도 전에 전철을 타고 집 앞에 도착했다. 핸드폰으로는 내 말이 잘 들렸을 텐데, 모른척하기 장인이다. 성질이 지랄 맞은 딸은 기어이 엄마에게 소리 지르며 왜 자꾸 못들은 척 하냐고 뭐라 했지만 엄마는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뚝딱 저녁으로 해결하고는 쿨쿨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같이 간 스시집에서 엄마는 그날따라 싸늘히 식은 스시에 인상을 구겼고, 나는 그날따라 좋지 않은 몸 컨디션에 운동화 쇼핑도 겨우겨우 마쳤다. 다행히 맘에 드는 신발을 두 켤레나 사줄 수 있었다. 대대적인 백화점 세일이 들어간 덕이었다. 아니었다면 딸에게 한 켤레도 안 받을 엄마였다. 늘 받기보단 베풀기가 적성인 엄마다. 집에 와서는 또 김치찌개에 어묵을 넣어 데워먹었다. 장봐 둔 스테이크나, 닭봉조림, 각종 반찬은 냉장고 바깥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그저 간단히 먹고 말겠다는 눈 큰 대구 할머니의 단호한 의지에 나는 못이기는 척 또 낮잠 자는 엄마의 머리카락이나 만지고 책이나 읽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제대로 각오하고 오픈런을 불사하며 엄마를 끌고 간 압구정 중국음식점에서 엄마는 또 인상을 썼다. 새우를 완자로 만들어 해삼으로 감싸 튀긴 ‘금사오룡’이라는 음식을 맛보여주러 데려간 거였는데 어째 표정이 뚱하다. 나름 진짜 화교들이 요리하는 정통 중식으로 유명한 맛집이었다.
“엄마, 이렇게 큰 해삼 봤나? 너무 맛있지 않나?”
엄마가 대답이 없다.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내 말 안 들리나?”
엄마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수입.”
“응?”
“중국산이라고. 중국산.”
이렇게 큰 해삼은 중국산밖에 없다며 인상을 팍 쓴다. 아빠가 생전에 해삼을 좋아해서 매번 국산 해삼을 사와 요리했기 때문에 이건 중국산임을 안단다. 하아...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엄마! 자식이랑 밖에 나오면 좀!”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웃음이 터지며 “맛있다..맛있다고.” 하면서 먹는 엄마다. 웃는 걸 보면 귀가 잘 안 들리긴 해도 내 말이 영 안 들렸던 건 아닌데, 대답하기 싫으니 그냥 안 들리는 척 한 거다. 나이가 저렇게 많은데도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거다. 엄마는 투덜거리면서도 음식 남는 건 못 봐서, 굴짬뽕과 짜장면을 다 긁어먹고는 집에 와서 또 잠이 들었다. 쿨쿨, 식곤증에 얼마나 달게 자는지...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 간병에 통잠을 별로 자지 못했다. 요즘은 맘껏 먹고, 맘껏 다니고, 맘껏 자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달달하게 흘러내렸다. 아빠가 없는 건 슬프지만, 엄마가 자유로운 건 기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오묘한 효심인지.
서울에 왔다간 뒤로, 엄마가 나한테 자꾸 혼나서 그런지 보청기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고민을 하곤 한다. 나는 새삼 마음이 약해졌다. 보청기를 끼면 귀에 물도 차고, 자꾸 웅웅거려 생각보다 생활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만 끼면 보청기와 귀가 맞춰지는 과정이 없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적어도 하루 8시간정도 계속 보청기를 껴야 하는 것이다. 보청기는 왜 끼는 것일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위해서다. 또한 내가 엄마의 귀가 안 들린다고, 내 말이 안 통한다고, 짜증을 부리고 발을 동동 구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실 이제 세상의 소리를 듣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맘껏 내뱉어도 되는 나이다. 평생 그만큼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됐지 않은가.
엄마는 요즘 에세이 수업을 들으러 다닌다. 원래 책을 좋아하던 엄마가 드디어 펜을 들었다. 맞춤법도 잘 모르고, 단락이 무엇인지, 명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엄마인데도 얼마나 열심인지, 밤이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글도 고쳐달라고 하는 등, 열정 과다 상태이다. 엄마의 글은 참 아름다웠다. 처음 글을 쓸 때의 설렘이 마치 운동회때 청군 백군 박에서 꽃종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비록 노트북이 없어 공책에 쓴 걸 카카오톡에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띄어쓰기도 없이 옮겨써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엄마는 처음 보는 자신의 글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의 글은 보청기가 필요 없었다. 엄마의 글은 엄마의 나이만큼 농익어 있었다. 엄마의 글은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직 보청기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이다.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날아다닐 엄마에게 조금의 불편함도 걸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작년쯤이었나. 아빠와 엄마가 대화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보자. 손톱깍이 어디에 뒀노?”
“신문 찾는교?”
“내가 분명히 여기 뒀는데.”
“신문 오늘 내가 갖다 버맀는데.”
“아, 니가 쓴다고?”
“네. 갖다 버렸심더.”
“알았다.”
세상에나 두 분은 아무렇지도 않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배가 아플 지경으로 웃자, 두 분은 어리둥절해 했다. 아, 정말이지, 너무 귀여웠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게 맞다. 노부부가 같이 귀가 안 들리자 더 귀여워진 게 아닌가. 언젠가 나를 둘러싼 모든 부모님의 소리가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그 때까지 엄마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겠다. 엄마, 안 들리면 내가 크게 얘기할게. 듣기 싫은 소리는 안 들리는 척 해도 돼. 마음가는대로 살아도 좋을 딱 좋은 나이 아닌가. 그깟 보청기 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