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제사 이야기
공항이 유독 붐비는 시즌이 있다. 바로 명절 즈음이다. 조상 덕을 본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가지만, 국내에 남은 자들은 중얼중얼 거리며 전을 굽는다. 시어머니 복이 있는 경우엔 시어머니가 나서서 “내 대에서 제사를 끊고 말리라!” 잔 다르크처럼 외치며 제사를 없애주기도 한다. 그럴 시어머니도 없는데다, 막내며느리로 시집왔지만 맏며느리가 되어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 말이다.
나는 3남매 중 제일 속편한 막내와 결혼했다. 하지만 집안의 우환이란 게 어디 눈치보고 찾아오는가. 나의 친정과 시댁은 지난 20여년이 넘도록 방송이라면 ‘삐-’ 소리 처리해야 할,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 험난한 파도 위에서 나는 튜브나 끼고 넘실넘실 몸을 맡겼고, 정신차려보니 제사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싫진 않았다. 20대에 정말 큰일을 겪으며 죽으려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때 이미 깨달았다. 어차피 세상에 못 일어날 일은 없다는 걸,
그래서 ‘제사? 그 정도쯤이야...’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그게 나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손님 초대하기 좋아하고 전 굽는 걸 즐기는 사람이면 가뿐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정식으로 내게 제사를 물려받으라 했다. 나는 시원하게 오케이를 날렸다. 아,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지만, 낙장불입이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원래 내 꿈이 복 많고 식구도 많은 집에 시집가서 재미나고 시끌벅적하게 사는 거였다. 모든 집은 알고 보면 다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속 시끄럽길 원했던 건 아니다. 내가 결혼하고 난후, 시댁은 난리북새통을 겪으며 십여 년 만에 환경이 완전 달라졌다. 아주버님까지 갑자기 떠나고 나자, 남편은 큰아들이 됐다. 남편과 나는 그 모든 풍파와 싸우느라 똘똘 뭉쳐야 했다. 친정은 원래부터도 잔잔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빠는 다정했지만 전직형사다운 거친 기개를 지니고 있었고, 그건 늘 아들에 대한 기대와 원망 사이에서 박격포처럼 터져 나왔다.
잠시 친정집의 속사정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릴 때 시계를 돌리는 아이였다. 아빠는 아들에게는 밤 12시 통금을, 딸에게는 밤 9시 통금을 선언했다. 나는 늘 통금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귀가했지만, 오빠는 보란 듯이 대놓고 통금을 어겼다. 나는 매일 아빠를 재우고 온 집안의 시계를 반대로 돌렸다. 아빠가 자다 깨도 시계는 늘 12시 전이었다. 술에 취한 오빠가 오면 나는 다시 시계를 돌려놓고 자야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내가 시집가고 난 뒤, 친정아빠는 뒤늦게 나의 행동을 엄마에게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시끄러운 싸움이 싫어 내 마음 속 평화를 지키고자 한 노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난 친정오빠와 사이가 썩 좋지 않다. 내가 그 때 그렇게 고생해서 지킨 평화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집집마다 그런 식의 스토리가 없는 집이 없다. 그런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게 명절이다 보니, 내가 겪은 명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은 시장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명절 즈음이 대목이었다. 그때는 명절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시장에 나와 양말과 속옷을 사갔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고,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양말을 신고 명절아침 모였다. 그래서 속옷장사를 하던 엄마는 명절이면 입에서 단내가 났다. 바빠서 밥도 잘 챙겨먹지 못했다. 어린 나도 같이 포장을 하고 물건을 팔아야 할 만큼 바빴다. 그러니 제사 준비까지 하려면 엄마는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잠은 사치였다. 엄마가 새벽에 가서 제사 준비를 돕고 시장으로 출근하면 내가 큰집으로 출발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사리손으로 동태포에 밀가루를 묻히고 동그랑땡을 뒤집었다. 숙모들은 그런 나를 귀여워했다. 주로 박카스 심부름을 하거나 부엌에서 잔일을 돕는 역할이었지만, 제사준비는 어린 나의 눈에도 곧 익숙해졌다. 나는 함께 모여 도란도란 하는 그 일들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나만 재미있었다. 명절 제사나 기제사를 지낼 때면, 아빠들의 표정은 엄숙해졌다. 특히 우리 아빠가 그랬다. 아빠는 집안의 군기반장이었다. 누가 약간 붉은 색이 들어간 옷만 입어도 혼을 냈고, 떠들어도 눈총을 줬다. 모두가 조용하고 경건하게 있어야 했다. 그렇게 긴장된 상태로 제사를 지내고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남자들이 먼저 밥을 먹고 그 남은 반찬에 여자들이 밥을 퍼와 잔반을 먹어치웠다. 그 후, 피곤한 엄마들이 뜨끈한 아랫목에 누웠다. 그제야 다 같이 추석특집 프로그램을 보거나 농담을 하며 강정을 먹는 등, 평화로운 시간이 돌아왔다. 서로의 다리를 베고 뒹굴다 보면 마치 우리가 아랫목에서 구워지는 노릇노릇한 고구마라도 된 듯 했다. 시간은 나른하게 흘렀고 오랜만에 만난 모두는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가 문을 드르륵 열며, “가자!” 한 마디면 우리 가족은 벌떡 일어나야 했다. 설거지도 남겨둔 채 옷을 챙겨 입었다. 아빠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집으로 모두를 데리고 갔다. 엄마가 피곤할까봐 그랬는지, 삼촌들이랑 싸웠는지 뭐, 자세한 상황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유독 명절이 되면 아빠는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건너 건너 들어보면 다른 집들도 아빠들은 명절이면 싸우고, 고모들은 울고, 엄마들은 지쳐있고, 애들은 눈치를 봤다.
대개 처음엔 하하, 호호 반가워 웃는다. 그러다 보면 어른들의 이야기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술 한 잔 기울이다가 어느 순간, 누구 하나 서운했던 게 사레들린 옥수수 알갱이처럼 툭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슬슬 어릴 때 차별 받았던 이야기가 나온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먹는 거 하나라도 큰 형만 주고 못 먹은 설움까지 나오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아들의 취직을 도와달라는 둥, 대를 건너 그 서운함은 영향을 주고 서러움은 배가 된다. 남에게는 아쉬운 소리 한마디 못하면서, 가족에게는 맡겨둔 짐 내놓으라는 듯 사과를 종용하고, 어려운 형편을 도와달라며 눈물을 흘린다. 이쯤이면 술이 웬수가 된다.
가족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그렇게 울고불고, 연을 끊니 마니 하다가, 다음 명절에 또 다시 술 한 잔 기울이다 보면 대충 상처가 봉합된다. 넘어진 애기 무릎 상처에 빨간약 한번 안 바르고 대일밴드 하나 딱 붙이곤 “됐다! 다 나았다!” 하는 식이다. 얼레벌레 넘어간다. 그래서 명절과 제사는 가족들에게는 상처를 헤집고 봉합하고 또 벌어지면 대충 꿰매는 병원놀이 비스무리 하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만은 어릴 때 놀던 그대로라서 일까.
요즘은 그런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 그냥 각자 가족만 챙기고, 여행이나 가고, 산소에 다녀오는 것으로 끝난다. 어쩌면 이제는 서로 상처를 줄 기회조차 없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건 맞지만,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이해할 기회도 줄어들었다. 우리 부모님대의 눈물겨운 피붙이 이야기는 그저 고루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시계를 돌리던 평화주의자였던 나는 이제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시댁의 평화를 나름 지켰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될 줄 결혼할 때는 꿈에도 몰랐지만, 인생은 그런 거다. 살다보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이제 시댁 어르신도 다 하늘나라로 떠났고, 남편과 장을 봐와서 대구에 사는 시누이만 올라와서 같이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친척은 더 이상 없다. 딸들이 고사리손으로 나를 도와준다.
십삼 년 전, 처음 맡은 제사 때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캄캄했다. 본 게 전부라, 그냥 흉내만 내며 시작했다. 물론 서툴러서 실수투성이였다. 지금은 베테랑이 되었지만, 그 사이 건강을 많이 잃었다보니, 그냥 대충 지낸다. 복잡한 몇 가지 전은 사고, 경상도식 나물 전을 열심히 굽는다. 시어른이 생전에 좋아했던 배추전이나 조기 같은 음식들을 준비하고, 탕국을 끓이면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난다. 그런데 이렇게 싸울 일도 없고, 간편한 제사준비 속에 어딘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진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웃고 울던 수많은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싸우고 서운하다면서도 조카는 데리고 가서 그렇게 잡채를 만들어 먹이던 작은 고모의 생전 얼굴도 떠오르고, 처음 결혼하고 낯선 시숙모들 틈에서 제사 준비를 하며 눈치껏 얼굴을 익히려 노력하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제사. 지내려면 힘들고 없으면 서운한 것일까. 언젠가는 거의 없어질 문화겠지만, 그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기억됐으면 좋겠다. 제사 준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른들도 아이처럼 얼마나 툭하면 잘 울고 다투었는지, 하지만 그 음식을 먹으며 깔깔 웃던 시간들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추억이 됐는지. 그것이면 충분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