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패션(fast fashion)의 시대다.
각종 브랜드들에서는 매일 쉴 새 없이 다양한 디자인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요즘 옷은 한 계절만 지나도 유행이 지난 느낌이 든다. 유튜브 영상들에서는 ‘뜨는 패션, 지는 패션’을 화두로 어떤 패션을 입어야 스타일이 뒤떨어지지 않을지 자세히 조명한다. 그런 시대에 절대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옷을 김장김치처럼 오래 묵혀 입는 사람이 있다. 옷을 사면, 일단 옷장에서 일년쯤 넣어놔서 자기 옷처럼 느껴져야 입는 사람, 바로 내 남편이다.
우리의 만남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통 처음 만날 때 불꽃이 튀었느니 마느니 하지만, 그런 과정은 없었다. 그는 미국,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창의 소개로 나는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당시 이역만리에서 외로움에 사무쳐 있던 그는 공들여 이메일을 썼고, 나는 스크롤 몇 번에도 끝나지 않는 긴 편지를 쓸 줄 아는 남자가 신기했다. 그러다가 국제전화로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수다쟁이인 둘 간의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방학을 핑계로 나를 만나러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의 이상형은 비교적 간단했다. 나는 ‘이성이 신발끈을 매는 모습에서도 매력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말이 잘 통한다 하더라도 바로 사귈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의 경우, 깻잎머리에 청재킷 입은 여자는 좀 별로라는 것이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 만나는 날 아무 것도 모른 채, 깻잎머리에 청재킷을 입고 나갔다. 우리는 그만큼 달랐다. 나는 그가 참으로 패션 감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도 촌스러웠고, 기대했던 ‘신발끈을 매는 모습’에서는 아무런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는 그날 드라이브하는 차 안에서 트림을 했다.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인연은 인연이었는지 우리는 단기간에 결혼까지 골인했다. 그만큼 서로 얘기가 잘 통했다. 패션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건 내가 예쁘게 사 입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예복을 사러 백화점에 가던 날이었다. 당시 예비 시어머니였던 어머님은 옷을 화려하게 입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잔뜩 멋을 내고 백화점에 와서 아들을 만나자마자, 유령을 본 듯 사색이 됐다.
“아니 그 코트, 몇 년 전에 내가 버렸는데? 어떻게 네가 다시 입고 있지?”
“아, 이거? 엄마가 버렸길래, 내가 주워서 미국에 갖고 갔지.”
알고 보니, 대학 입학식 날 입었던 더플코트를 어머님이 낡았다고 버렸는데, 그걸 본 아들이 말없이 주워 다가 계속 입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예복을 사러 가는 날, 안감이 밖으로 덜렁 떨어져 나온 그걸 입고 나왔으니, 그 옷은 어머님에게 죽지도 않고 돌아온 각설이였다. 반면, 예비 사위의 안감 나풀거리는 더플코트에 감동받은 아빠는 사위에게 질좋은 코트를 선물했다. 멋쟁이였던 아빠는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골랐고, 그 코트는 아직도 옷장에 있다. 남편은 내가 늦잠 자는 날이면, 여전히 그걸 몰래 입고 나간다.
요즘 낡은 옷을 입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쩜 그렇게 오래된 걸 좋아하는지, 결혼해서 신발장에 중학교 때 신던 신발이 있던 걸 보고, 나는 앞이 아득해졌다. 이 사람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오래된 옷이 편하다고 했다.
몸에 붙는 건 싫고, 옷이 내 몸을 적당히 여유롭게 휘감는 걸 좋아했다. 가만 보니 그는 옷 뿐 아니라 모든 것에서 그저 편한 걸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크게 화낼 줄도 모르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내가 새 옷을 입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변화에 크게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같이 살기에 편했다. 오래된 옷처럼 살면서 서로 더 정이 들어갔다. 조선시대 얼굴도 안 보고 한 결혼이 오래 산다더니, 우리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그런 남편을 친정아빠는 몹시 좋아했다. 예민한 아빠는 사윗감으로는 무던한 사람을 선호했다. 센스도 없고, 멋도 없는 사위를 두고, 아빠는 멋을 ‘못 부리는 게 아니라, 안 부리는 거’라고 믿었다. 그게 그거지만, 아빠는 멋없는 사위를 유독 좋아했다. 살갑게 굴지도 못하고 자주 챙기지도 못했지만, 그저 무뚝뚝한 자식을 사랑하듯, 사위를 그렇게 감쌌다. 일찍부터 공부하느라 부모랑 떨어져 타지 생활한 사위에게 다시 만난 부모처럼 그저 따뜻하게 사랑을 주고 싶어 했다.
작년 초, 아빠가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였다. 사위에게 양복을 한 벌 해 줘야겠다며 백화점을 가자는 게 아닌가. 당시 아빠는 뇌졸중과 코로나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도 10미터 걸으면 쉬어야 하는 건강상태였다. 그런 아빠를 데리고 백화점을 간다는 건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일이었다. 그냥 우리가 사 입겠다고 돈만 달라 해도, 자린고비 사위를 잘 아는 아빠는 본인이 굳이 같이 가서 골라주겠다고 우겼다. 엄마, 남편, 나, 그리고 큰딸까지 모두가 총출동했다. 백화점 도착 전, 아빠는 이미 지쳐있었다. 그러나 백화점 1층에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르는 아빠가 앉을 곳이 없었다. 그 때 명품관 매장에서 손님용 소파를 발견한 아빠는 더 걷기 힘들어하며 그 곳에 잠시 앉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매장 매니저에게 부탁을 했다. 너무 많이 힘들어하셔서 그런데 딱 5분만 좀 앉아도 되겠냐고.
“구매를 하시는 게 아니라면 곤란합니다.”
그녀는 딱딱하고 날선 말투로 우리에게 인상을 썼다. 구매? 구매? 얼마면 돼! 내가 사면 될 거 아니야!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귀도 잘 안 들리는 아빠를 향해 소리치며 붙들었다.
“아빠, 안 된대요! 앉지 마요!”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남성복 매장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사람들이 비틀거리는 아빠의 걸음을 보고 주춤주춤 다 길을 비켜줬다. 그렇게 5층까지 올라가서, 눈앞에 보이는 빈 의자에 잠시 아빠를 앉혔다. 아빠는 큰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매장 위치를 미리 파악하고 오겠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도 함께 두고 가니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주차 중이었고, 큰 딸은 매장에 가서 미리 의자를 마련해두겠다고 간 후였다. 매장을 확인하고 돌아오자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빠는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빠는 체구가 많이 크다. 아빠를 부축해 화장실로 가는 길이 천릿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엄마도 화장실에 간 터였다. 큰딸과 나는 거구를 양쪽에 팔짱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갔다. 화장실 앞에서 엄마를 만나자마자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고, 엄마는 아빠를 받아 남자화장실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나는 이미 울상이었고,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렇게까지 사위 옷을 사 입혀야겠다고? 기어이? 도대체 왜?
“장인어른이 이렇게 백화점 나와서 내 양복 사주시는 날이 또 있겠어?
화 내지 마.”
남편이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아빠가 오래 사셔도 또 서울에 있는 백화점에 올 일은 없을 듯 했다. 결국 아빠는 원하는대로 매장에 앉아 사위가 입어보는 옷들을 구경하며 흐뭇해했다. 아빠는 네이비색 이태리 원단의 양복을 골랐다. 맞춤이라 가격도 비싸고 시간은 좀 걸린다했지만, 모두의 마음에 쏙 드는 양복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빠는 몇 달 뒤, 또 코로나에 걸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더운 날 떠날 걸 알았는지 미리 준비해 둔 삼베 수의를 입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장례식 내내 생각했다. 아빠는 좀처럼 오래된 양복을 벗지 않는 사위에게 멋진 새 양복을 사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양복 한 벌 사줄 테니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빠는 약간의 폐렴끼와 미열로 멀쩡하게 걸어서 응급실로 들어가서는 며칠 만에 의식불명이 됐다. 아빠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나를 기다렸다. 서울에서 급히 내려온 나는, 눈을 꼭 감고 아무 의식이 없어보였지만 평화로운 얼굴을 한 아빠의 두 손을 꼭 붙들고, 귀에 대고 말했다.
“아빠, 미안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삐’ 기계음이 났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아빠 몸에 주렁주렁 달린 선을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떠난 게 아닌가 싶어 울부짖었다. 제가 선을 잘못 건드린 것 같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순간에 떠났을 리가 없었다. 다들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아빠 뺨을 만지자마자 떠난 건 그 누구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좀처럼 표현이 없는 남편은 그날 많이 울었다. 마치 자신의 친부모가 떠난듯. 그리고 양복을 입고 영정사진을 들었다.
“자네, 내 딸이랑 결혼할건가?”
처음 만난 청년에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당신의 딸을 넘겨주겠다는 선언이었다. “네.”라고 넙죽 대답한 남편과 아빠는 그 날부터 술동무가 됐었다. 전직 형사였던 아빠는 남편감을 데려오면 3대 위까지 족보를 샅샅이 훑어보겠다더니, 그를 보자마자 그냥 딸을 넘겨줬다.
아빠는 단정한 옷차림을 좋아했다. 목 부분에 칼라가 없는 옷은 옷이 아니었고, 발목 복숭아뼈 아래로 내려오는 바지는 너무 길다고 여겼다. 딱 붙지 않는 클래식한 옷을 좋아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그런 남자를 데려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얼굴도 보지 않고 연애를 한 남자가 그런 차림으로 나타났다. 아빠와의 첫 만남 때 남편은 단정한 폴로셔츠에 헐렁하고 짧뚱한 바짓가랑이를 뽐내며 나왔다. 훗날 아빠는 그 옷차림과 짧게 다듬은 손톱을 보고 한방에 결혼을 허락했다고 했다.
요즘 길에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평소엔 아빠가 생전 입던 옷들을 입는다. 그리고 옷장엔 여전히 그날의 더플코트가 걸려있다. 낡은 옷이면 어떤가. 단정하면 됐지. 유행에 민감하지 못하면 어떤가. 장인어른에게 사랑받고, 그 분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짧은 바지 길이로 영정사진을 들었던 남편을 나는 사랑한다. 옷은 사람을 감싸는 천이다. 사람이 귀하면, 옷은 빛난다. 그렇게 나는 남편에게 패션을 배웠다. 올 겨울, 나는 옷을 사지 않아도 따뜻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