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담아 주께!”
이건 결혼 전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그냥 맘 편히 시집가라는 말이었다. 갈치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내게 손을 내저으며 그냥 시집가라고 한 건 대구에 사는 큰엄마였다. 혹여나 이제 갈치김치를 다시는 못 먹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표정이 내 얼굴에 다 드러난 게 틀림없었다. 네가 김치를 왜 담느냐며 그냥 가라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그 후로 콜로라도든, 서울이든, 어디 있든 간에, 나는 큰엄마가 담아준 갈치김치를 오랫동안 받아먹었다. 그 계절이 오고 있다. 늦가을, 김장철이다.
갈치김치는 말 그대로 김장김치 안에 건빵만한 크기로 작게 썰어진 갈치가 쏙쏙 박혀있는 김치다.
생선이 들어가서 비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아니다. 먹어본 자만이 안다. 잘 담근 갈치김치는 맛이 들고 나면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빨간 고춧가루 양념을 넉넉하게 버무린 갈치는 배추 이파리 사이로 그 은빛 존재를 살짝 감추고 있기 때문에 거부감도 크게 없다. 삭은 갈치는 뼈째 씹어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 말캉해진 식감 때문에 쫀득한 느낌도 난다. 김치에 든 청각은 인상 찌푸리며 징그럽다고 싫어했으면서, 토막 낸 갈치는 신나게 씹어 먹던 나의 모순적인 입맛이라니.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갈치김치를 좋아했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고 나서도 친정에 들르면, 김치 통을 샅샅이 뒤져 갈치를 찾아 김치 위로 가득 올려줬다. 사실 갈치김치는 이파리 사이에서 왕건이를 하나씩 찾아먹는 게 더 맛있다. 하지만 아빠는 상 위로 무심히 툭, 정말 김치가 보이지 않을 만큼 갈치로 탑을 쌓아 올려줬다. 나중에는 너무 먹어서 입에서 생갈치 맛이 날 정도였다. 친정에 간다는 건 그런 거였다. 애들을 키우느라 나는 뒷전이던 시절, 그 어디에서도 받지 못할 귀한 대접을 받는 날이었다. 특히 애들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할 수 있는 날이었다.
‘김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세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는 요즘이다. 옛날에는 일가친척들이 모두 시골로 내려가 바짓가랑이 걷어 부치고 장화를 올려 신고는 몇 백 포기씩 김치를 담는 풍경이 예사였다. 물론 아직도 그런 집들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 나온다.
“요즘 김치가 얼마나 맛있게 잘 나오는데 그냥 사 먹자고요. 이제 그만 고생하세요. 네?”
부모님 고생하는 것도 싫지만, 김장을 도울 시간과 여유도 없는 게 우리들이다. 눈치 보며 누구는 돈만 보내고, 누구는 몸으로 때우느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김치 소비도 예전 같지 않다. 맞벌이 집이 많아지면서, 그 많은 김치를 다 먹어치우기도 힘들다. 지금 우리집 김치냉장고에도 4년 된 묵은지가 처치곤란으로 들어있기도 하다. 씻어먹고, 지져먹어도, 세상에 먹을 게 너무 많다보니, 묵은 김치는 순위에서 밀린 지 오래다. 외삼촌네가 담아준 맛난 김장김치였는데, 미안한 마음뿐이다.
우리 엄마도 김치를 맛나게 잘 담궜다. 신혼시절, 미국 콜로라도에 살 때였다. 딸 신혼집에 간다는 핑계로 난생 처음 미국에 올 엄마를 기다렸다. 들뜬 엄마가 사위가 좋아하는 김치를 담아오려다 허리디스크가 터져 2년을 누워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결국 엄마는 오지 못했다. 평생 엄마 음식을 먹고 자란 사람은 그 음식 맛을 지문처럼 기억한다. 나는 그 뒤로 엄마가 그리워 김치를 담갔다. 한라산 중턱 정도의 높이인 콜로라도에서는 배추가 숨이 잘 죽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김치 맛을 내기 위해 욕조 속 배추를 퍽퍽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먹어보니 쓴 맛만 났다. 사실 나는 그 후부터 엄마가 김치를 담는 것도 싫었고, 나도 김치를 담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옳고 그르다고 정답을 내릴 순 없다. 늦가을이 오면 김치를 담그는 게 정답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예전부터 땅에 묻어가며 아껴먹었던 김장김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문화였다. 그래서 그걸 지켜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 문화도 변하는 법이다. 김치 담다가 허리 부러진 우리 엄마처럼 다들 고생고생하며 옛날 방식을 고수할 필요도 없다. 이제 간수를 뺀 천일염으로 절인 배추를 여러 번 씻어 정성들여 김치를 담아주던 엄마들의 손맛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될 듯하다. 엄마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김장김치 맛이 내 뇌세포 사이사이, 혀의 돌기 틈으로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는 건 사실이라, 결국 집에서 담는 김치가 다 사라지고 난 후 수십 년 후에는, “세상에, 옛날엔 집에서 김치를 담아먹었대.” 소리를 듣는 건 무척 서운한 일일 거 같긴 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갈치김치를 못 먹게 된 데는 좀 더 다른 이유가 있다.
큰엄마는 요즘 아기가 되어가고 있다.
고약한 치매가 큰엄마의 시간을 반대로 되돌리고 있다. 큰엄마는 예전 일들을 아주 잘 기억한다. 내 딸들의 어린 시절부터 더 나아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곧잘 한다. 수영도 가고, 친구도 만나지만, 뒤돌아서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랑 실컷 옛 이야기하고 뒤돌아서면 내가 온 사실조차 까먹는다. 냉장고에 있는 모든 반찬은 뭔지 모르니 무조건 버려버리고, 우리 아빠 장례식에 와서도 누가 죽은 건지도 몰라 울지 않았다. 그런 큰엄마가 갈치김치는 기억해도, 담을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얼마 전, 아빠의 첫 제삿날, 큰엄마가 사촌오빠와 함께 왔다. 반갑게 내 큰 딸을 보고, “이야, 얘 어릴 때부터 인사성이 엄청 밝았잖아. 데리고 슈퍼에 가면 사장님이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몰라. 인사 잘한다고. 지금 다시 보면 깜짝 놀랄걸? 이렇게 커서?”하며 청산유수로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 다음에 오빠의 딸을 만나자, “이야, 얘 어릴 때부터 인사성...” 똑같은 이야기를 해댔다. 과연 누가 인사성이 밝았던 건지 우리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나였을 수도, 사촌언니였을 수도, 다른 아이였을 수도 있다. 뭐 어떠랴. 큰엄마의 기억 속에 모든 아이들은 착하고 인사성이 밝았었나보다.
그날 밤, 제사를 지내고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큰엄마가 흐뭇하게 입을 뗐다.
“이 집 음식 잘 하네. 나물도 잘하고, 김치 맛도 좋고, 이야, 여기 손님들 봐라. 이렇게 북적대는 거 보니, 유명한 맛집인가 보다.”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만큼은 유쾌한 치매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큰엄마는 “이 집이 맛집이다.”고 칭찬했고, 모두들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큰엄마는 마냥 행복해보였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그렇게 밥을 먹던 풍경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그렇게 내게서 큰엄마를 서서히 앗아갔고, 갈치김치를 담글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금은 남달랐던, 사건사고 많았던 우리집에서 막내이면서도 힘든 일들을 잘 이겨냈다고, 큰엄마는 나를 유독 예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갈치김치를 담아준다던 큰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걸 지킬 필요도 없는 거지. 큰엄마가 무릎수술을 했던 이유에는 갈치김치의 지분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텐데 무슨 낯짝으로 계속 그걸 받아먹었는지 모르겠다.
큰엄마도 불로장생은 불가능한 일인데 어떻게 평생 담아준다는 거였을까. 아마 마냥 어린 내가 김치 양념에 손 담그지 말라고, 날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게다. 어차피 큰엄마가 담아주는 갈치김치 맛이 아니면 내게 의미가 없는 거다. 큰엄마는 영원히 내게 큰 사람이었다. 딸들아, 미안하다. 너희 엄마는 김장은 못하겠다. 갈치김치도 못 담근다. 허리도 무릎도 부실하다. 대신 조금씩 담아먹는 김치를 만들어볼게. 올 가을, 우리 같이 담아볼래? 도망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