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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놀이 할 줄 아세요?

by 소리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겁도 없이 전우의 시체는 왜 그리 넘고 다녔을까. 노랫말의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리를 쫙쫙 찢으며 고무줄을 넘는 여자아이들은 정말 전장의 군인이라도 되는 듯 씩씩했다. 다리를 올려 고무줄을 착 가져와 그 가는 줄을 감고, 풀고, 밟고, 뛰고...심지어 고무줄이 종아리에 닿는 마찰력을 이용해 싹 도는데 눈빛은 자신감에 빛나고 앙 다문 입은 어찌나 멋있던지 나는 현기증이 났다. 아마 그 때 뛰고 있던 아이들보다 내가 그 모습을 더 잘 기억할 듯 하다. 나는 늘 관찰자 입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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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도 나는 키가 컸다. 반에서 제일 큰 편이었다. 다리길이도 길어서 누가 봐도 고무줄놀이에 최적화된 아이였다. 하지만, 겁이 많아 고무줄 위에 발을 올려놓은 적이 없었다. 고무줄이 끊어지면 살갗이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 심지어 내가 아픈 것을 넘어, 그 고무줄이 잔인하게 끊어질 때 그 가느다란 생명을 다하는 순간이 안타까워서 발을 올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을 부르며 금강산의 명맥을 찾아 떠났고,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목소리 높여 달콤한 노래로 입맛을 돋우었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늘 어딘가로 떠나는 것 같았다. 그 때마다 나는 그들과 떨어져 가만히 교실을 지키는 아이였다. 왕따는 아니었다. 그나마 공기놀이는 좀 잘 해서 공기할 때는 아이들이 날 찾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체육이나 신체활동 시간에 나는 그냥 없는 아이였다. 달리기는 꼴찌였고, 고무줄이나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오징어게임처럼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 때면 자연스레 나는 혼자였다. 내 별명은 ‘있는 둥 마는 둥’이 됐다.


그래서 고무줄을 잘하는 여자아이들은 내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가늘고 탱탱한 그 존재 따위는 가뿐히 즈려밟고 멋지게 자신의 갈 길을 가는 아이들처럼 보였다. 고무줄 그게 뭐라고. 하지만 그건 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고무줄은 내게 늘 두려움의 존재였고 나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선생님이 수업 중 심부름을 보내면 그 길고 적막한 복도가 무서웠고, 다른 층으로 올라갈 때 그늘진 공간들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으며, 높은 천장은 나를 짓누르는 거 같았다.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겨우겨우 심부름을 했다. 사람 많은 공간에서 외로운 게 차라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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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초등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하거나, 집이 잘 살거나, 예쁘거나 뭐 하나 뛰어난 게 있어야 학교생활이 쉬웠다. 그 중 아무 분야에도 특출 난 게 없었던 나는 이야기를 잘 하는 것으로 겨우겨우 아이들 틈에서 살아남고 있었다. 나는 발표를 잘 하는 아이였다. 손을 들고 의견을 얘기하거나, 도란도란 앉아 입으로 노는 건 자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 회장선거에서 성적을 무시하고 추천을 받았다. 처음이었다. 줄반장 한 번 해보지 못했던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부회장이 됐고, 그날 강당에서 연설을 한 후, 전교부회장이 됐다.


고무줄 하나 밟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엄청난 기적이었다. 그길로 나는 시장에 장사를 하고 있는 엄마 가게로 뛰어갔다. 학교에서 십여 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전속력으로 뛰었다. 달리기 꼴찌에게는 그 날이 평생 제일 빨리 뛰었던 날이었다. 사람들 사이로 부딪치며 밀려가면서도 앞으로 막 뛰었던 것 같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서 말도 잘 하지 못하면서 엄마에게 임명장을 내밀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가게에 있던 모두에게 자랑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평소 잘하는 것도 없고, 크게 칭찬받을 일도 없던 내게 그 날은 축제였다. 가게 천장의 전구들이 팡팡 터지며 축보를 울리는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배경은 시장이었지만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탄생과 같은 순간이었다. 후로 나는 그렇지 않아도 큰 키에 빳빳이 올라간 뒷목으로 인해 키가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세상이 조금 덜 무서웠다.


고무줄을 잘 하는 아이들도 좀 덜 부러웠다. 누구나 자세히 보면 잘난 곳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눈에 입술이 두껍고 못생긴 나도 사랑받을 수 있고, 느린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나는 큰 목소리로 열심히 발표했고,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글을 썼다. 글을 쓰는 일은 나에게 최고의 힐링법이었다. 공부로는 뒤쪽에 섰으나 백일장에서는 앞쪽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후에도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젬병이었다. 제자리멀리뛰기는 늘 폴짝 한 뼘이어서 체육선생님이 너 키대로 그대로 엎어져도 176센티는 될 거라며 한숨을 쉬었다. 체력장 만점을 받아본 적도 없고, 100미터 달리기는 25초, 매달리기는 0초였으며, 이어달리기는 내가 나가면 우리 반이 꼴찌로 정해졌다. 하지만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잘한 적도 있으니 다리보다는 팔을 휘두르는 게 좀 더 적성이었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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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고무줄을 착착 감고 뛰던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차피 고무줄을 머리 위로 올리면 다리가 찢어지지 않을 아줌마들이 됐겠지. 고무줄을 끊어먹고 도망가던 남자아이들은 배나온 아저씨들이 됐겠지. 어차피 그 때 고무줄을 잘하던 그들이나, 못하던 나나, 끊고 다니던 장난꾸러기들 모두 다 고무줄로 먹고살지는 않고 있는데 나는 왜 그 때 고무줄에 그렇게 연연했었나 모르겠다.

그 때 고무줄놀이를 유독 잘하던 인기 많고 공주 같던 친구가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 아이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그 후로 다시 삶을 되찾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산다는 소식도 들었다. 반대로 고무줄을 못하던 나도 뭐 그럭저럭 고무줄이 필요 없는 삶을 잘 살고 있다.


그때는 고무줄이 마치 삶의 등급을 나누는 검은 선처럼 느껴졌었다. 리가 높이 올라갈수록 높은 위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는 건 고무줄의 유연함만큼이나 예측불가다. 위로 아래로, 우리는 끊임없이 등락을 반복하며 지금껏 삶을 살아내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고무줄이 끊어지는 순간만 겁냈을까. 고무줄이 휘고 늘어나고, 착착 감기는 그 느낌을 경험해볼 생각은 못했을까. 겁내지 말걸. 같이 어울려볼걸. 시도도 해보지 않고 그저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웠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고 아쉽다. 혼자 쭈그리고 앉아 외롭게 흙에 그림을 그리던 어린 나를 안아주고 싶다.


요즘 들어 자꾸 글쓰기가 겁이 났다. 남들은 잘만 쓰고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겁이 난다는 건 글 잘 쓰는 작가들을 동경해서겠지. 고무줄에 발을 올리던 아이들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고무줄에 발을 못 얹던 그 때 나로 돌아가서 용감하게 한 발 얹어보자. 의외로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끊어져봤자 고무줄이고 떨어져봤자 공모전이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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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