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
그녀는 코 옆에 새까만 점이 있었다. 수업 첫날, 그녀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는 저 사람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재킷에 귀밑 단발머리, 일자로 자른 앞머리가 누가 봐도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80년대 일본배우 같았다. 키는 아담했고 약간 촌스러운 패션에 나이는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였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되자, 그녀는 본인 이름이 ‘치카코(Chikako)’라고 소개했다. 나는 미국에 갓 어학연수를 온 22살 대학생이었다. 우리가 친해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젊은 날엔 젊은 줄 모른다는 노래 가사는 틀렸다. 나는 내가 가진 유한한 청춘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지 않은가. 주어진 6개월의 기간 동안 나는 신나게 놀아댔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말을 잘 섞는 내 주변머리 덕에 나는 금세 친구들을 사귀었다. 낮에는 공부를 했고, 밤이면 직장에서 연수 온 한국인 아저씨들과도 소주를 기울였으며, 브라질에서 온 애들과는 파티에서 춤을 췄고, 사우디에서 온 피앙세가 있다는 남자애가 결혼하자며 치근대자 ‘그럼 내가 몇 번째 부인이 되는 거지?’ 상상도 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정말 그 쪽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여하튼 나는 통금시간이 9시인 보수적이고 엄한 경상도 집안에서 떠나 처음으로 폐 속 깊숙이 자유를 들이켰다.
몇 주가 지나자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 퀸카가 윤곽을 드러냈다.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도미나카공화국의 VJ출신이라는 여자아이도 아니었고, 호수 같은 눈 크기의 프랑스 여대생도 아니었다. 당연히 나도 아니었다. 우리 반의 퀸카는 치카코였다. 치카코의 코 옆 점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다. 그녀의 무기는 미모도, 키도, 영어실력도 아니었다. 치카코는 정말 말 그대로 너무 ‘웃겼다’. 그녀가 입만 떼면 우리는 모두 다 자지러지게 웃었다. 어느 순간 모두가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카페테리아 그녀 옆자리는 늘 만석이었다.
치카코는 남편회사에서 보내준 연수에 따라 나온 착실한 와이프였다. 심지어 그녀는 와세다대 법대 출신에 법률회사 비서출신이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남편도 잘생겼고, 그녀의 모든 것은 완벽해보였다. 그 완벽한 환경에 남달리 웃기는 유머감각은 어마어마하게 언밸런스한 느낌을 줬지만 사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더 완벽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치카코와 친해졌던 건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어학연수는 도피성 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한없이 웃고 있었다. 웃다가 눈물이 나는 건 예사였다. 나는 어느 틈에 그녀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도 나를 참 아꼈다. 우리는 자매가 되기로 했다. 내 성을 따서 치카코는 손치카(Son-Chika)되었고, 나는 뭐였더라. 치카코 성이 타카다(Takada)였는데 내 이름은 치카손(Chika-son)이 되었던가? 뭔가 말도 안 되는 그 상황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는데 이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녀 간의 이별보다 더 슬픈 이별의 순간은 찾아오고야 말았고, 우리는 꼭 계속 연락하자며 약속했다.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지만, 치카코는 손편지를 사랑했다. 그 때가 2000년대를 코앞에 둔 시절이어서 모두가 신문물인 이메일을 썼지만, 우리는 마치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듯, 시대를 무시하고 열심히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치카코는 글씨체도 예뻤고 엽서도 항상 가족사진이나 풍경사진을 찍어서 직접 만들어 보냈다. 그녀의 손편지는 쉽게 쓸 수 있는 이메일보다 훨씬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었기에, 우편함에서 치카코의 편지를 꺼내들 때면 나를 이토록 귀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애틋하기만 하던 시간이 쌓여가던 어느 날, 치카코는 한국에 나를 만나러 왔다.
호텔도 아닌 우리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우긴 것은 나였을 것이다. 한국이 처음인 그녀에겐 모든 게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예의바른 일본인인 그녀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진짜 캐리어를 끌고 우리 집에 들어섰다. 일주일쯤 머물렀던 것 같다.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교도 가보고, 내 친구들과 후배들도 만나고, 경주로 여행도 가며 추억을 많이도 쌓았다. 우리 엄마는 한국음식을 잔뜩 차려서 대접했는데, 청양고추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매운 걸 못 먹는다는 말도 못하던 치카코가 생각난다. 그걸 매일 먹으며 맛있다고만 하는 치카코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위경련이 일어나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자 그제야 고백하는 바보 같이 착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날 밤, 내가 왜 너는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그녀는 도쿄 같은 사회에서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철없는 내가 아이는 꼭 가져야 한다고, 넌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밤새 설득을 했다. 왜 그랬을까. 남의 인생을 가지고 그러면 안 되는 줄 몰랐다 치자. 그녀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는데 몰랐을까. 내가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라는 사실을. 심지어 내가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어린 아가씨였다는 걸. 그녀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나보다. 그녀는 나를 진짜 친구로 대해줬다. 그날 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일본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 사죄한다고도 이야기했었다.
얼마 후 돌아간 치카코는 거짓말처럼 아이를 가졌다. 남편을 닮은 아주 귀여운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내가 한 말들을 믿겠다고 했다. 약속대로 정말 아이를 잘 키워냈다. 우리는 더 자주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보내오는 편지봉투는 점점 아들의 사진들로 두툼해졌고, 연하장에는 단란한 세가족의 사진이 자리 잡았다. 그녀의 이사 사실도, 아들의 유치원 입학사진, 초등학교 입학사진도 다 내 손으로 받았다. 나는 그녀의 엽서와 사진들을 앨범에 고이고이 간직했다. 그 곳에는 그녀의 인생이 다 들어있었다.
나는 참 못난 사람이다. 그런 고마운 그녀와의 우정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유학을 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고 다시 정착하는 동안 나는 많은 곳을 옮겨 다녔다.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메일도 주고받으며 서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우리의 대화는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앨범 속 고이 간직된 편지들처럼 우리의 우정은 색이 바랬다.
내 탓이 더 클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아이는 아토피로 수시로 울어댔고, 알러지가 심해 응급실로 자주 뛰어야 했다. 친정도 멀리 있으니, 나는 잠자는 시간도 모자라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치카코는 아들을 키우면서 어떻게 내게 그렇게 많은 편지들과 사진들을 보냈을까. 그렇다. 내가 하는 말들은 다 변명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주고받는 편지가 줄어들었고, 확인 못한 이메일도 쌓여갔다. 나는 서울생활에 적응하느라 다른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둘째까지 태어나자 더 바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 도쿄에 큰 지진이 났을 때, 한밤중에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내게 치카코는 낮은 온도의 목소리로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느꼈다. 내가 먼저 치카코의 손을 놓아버렸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치카코는 이미 상처받았다는 사실도. 이미 우리는 많이 멀어졌다는 사실도. 우리는 서먹해졌고, 손편지는 끊어졌다.
인연은 소리 없이 멀어진다. 가까워질 때는 요란하다. 처음 치카코를 만나던 순간이 영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다 기억이 났는데, 멀어질 때는 치매 걸린 노인처럼 그냥 모든 게 흐릿해졌다. 뒤돌아보니 치카코와의 인연이, 사라진 손편지가, 내 인생 어디쯤엔가 버려져있다. 나는 그녀를 두고 어디로 걸어가고 있었던 걸까. 앨범을 펼치자 그때의 빛나던 그녀의 얼굴과 신나는 글씨 위에 앉은 먼지가 보인다. 스윽 닦아본다. 그녀가 나를 다시 웃겨주면 좋겠다. 나는 광대처럼 웃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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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지내셨나요?
발행일이 아니지만 글 미리 올리려다 실수로 브런치북에 넣지 않고 발행했네요ㅜ
그동안 너무 오래 글을 못 써서 이런 만행을..
오랜만에 오셔서 라이킷주신 작가님들과
댓글 달아주신 작가님들 죄송합니다ㅜ
한동안 컨디션 난조로 연휴 내내 2주 넘게 브런치에 접속도 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용실가서 머리를 푸들처럼 볶았어요.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구질구질한지, 왜 계속 아픈지,
그런 걸 생각하면 끝도 없이 가라앉지만
사랑받았던 기억이, 어느 한 순간 내가 빛났던 날들이 있었다는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렇게 힘을 내 보았습니다. 몸은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지만
내가 받았던 손편지는 영원히 앨범 속에 잘 있네요.
손편지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래도 내 소중한 치카코를 기억하며 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