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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에서 배가 고픈 이유

간식 카트가 사라진 기차여행에 대하여

by 소리글

조금은 지쳐 있었나 봐

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 보면...(중략)


가수 김현철의 ‘춘천가는 기차’라는 노래를 몹시 좋아했다. 여기서 ‘부대어 보면’이 무슨 뜻일까? 이번에 자세히 찾아보니 ‘부대다’는 ‘부딪치다’의 충청도 방언이라고 한다. 그런 것쯤은 모르고 흥얼거려도 좋은 노래였다. 어느 정도 뜻은 넘겨짚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차는 언제나 그렇게 그저 ‘부대어’ 봐도 좋은 존재였다. 늦을까 열심히 뛰어 기차에 올라탈 때면 옆 손잡이를 잡고 내 몸을 붕 일으켜 힘차게 던져 넣었다. 치이던 일상에서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 줄 라는 믿음이 있었다.


고향이 대구이다 보니 기차를 많이 타고 살았다. 서울까지 3시간 반이 걸리던 새마을호가 제일 빨랐던 시절부터 기차를 탔다. 그것도 비싸면 4시간, 5시간 걸리는 무궁화호, 통일호를 탔다. 그 때는 잠깐 쉬는 정차역마다 간식거리를 그렇게 많이 팔았다. 특히 호남선과 경부선이 대전역에서 선로를 바꾸느라 정차 시간이 다른 역보다 길었는데, 그 덕에 대전역에서는 잠깐 내려 가락국수를 사먹을 수 있었다. 남편은 그 때 먹은 가락국수 맛을 지금까지 찾아다니지만 매번 그 맛이 아니란다. 꿉꿉한 기차 안 공기에서 탈출해 역사에서 찬바람을 쐬며 급히 밀어 넣는 뜨끈한 국물 맛을 이제 와서 찾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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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는 기차가 떠날까봐 조바심이 나 가락국수를 사먹을 수가 없었다. 체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차 밖 풍경을 보며 간식을 파는 카트를 기다렸다. 꽤 좁은 통로를 지나가기 위해 고안된 카트는 간식들을 위로 벽돌쌓기 하듯 적재해서 싣고 다녔다. 카트가 다가오면 눈동자를 재빨리 굴렸다.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어디 놓여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게 도착할 즈음에는 거의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실 나에겐 고민할 필요도 없는 영혼의 간식이 있었으니, 바로 바나나 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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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는 당시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던 음료였다. 입구를 감싼 초록색 은박 종이를 톡 까서 마시면 텁텁한 공기를 열어젖히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달달하고 시원한 맛. 다른 음료들이 가지는 기차 안 위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인공이라 믿고 싶지 않은 신선한 바나나향이 지친 내 후각까지 자극하는 그 순간. 바나나우유는 메마른 내 감성까지 촉촉이 적셔주었다. 그 밖에도 삶은 달걀, 마른 오징어, 각종 봉지과자들 등, 동네에서도 사먹을 수 있던 그 흔하디흔한 간식들이 왜 기차 안에서는 특별히 맛있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차는 나를 싣고 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 설렘 속에서는 사실 무엇을 먹어도 좋았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63빌딩을 보러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장사에 바빴던 엄마가 유일하게 방학 때만 가끔 나를 데리고 서울에 사는 엄마 친구 집에 가거나, 반대로 아줌마가 아들 둘을 데리고 놀러왔다. 대학 시험을 치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서울로 향할 때도, 친구와 처음으로 바닷가로 여행을 갔을 때도,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이민가방을 싸서, 전날 미리 아빠와 함께 서울로 올라갈 때도, 나는 기차에 타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기차를 탈 때에는 대개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몸이 둥둥 떠올라 기차 천장에 손이 닿을 듯 했다.


UNSPLASH

반면 결혼을 하고 서울에 정착을 한 뒤로는 기차를 타는 이유가 좀 달라졌다. 애를 둘 낳고 키우는 동안, 친정 부모님이 곁에 없는 게 참 서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나도 친정집에 가서 드러누워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밥 먹자.” 하는 소리에 기어와 푸짐한 엄마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아기는 매일 빽빽 울어댔다. 달래보고 또 달래보다가 아기를 잡고 같이 울곤 했다. 아토피도 심했고, 음식 알레르기는 더 심해서 쌀도 계란도 못 먹이고, 이유식 하나도 성분에 조심하며 만들어 먹여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주면 아기는 신이 나서 손으로 휘휘 젓다 엎어버리곤 까르르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 울었다. 서울생활이 어찌나 지치던지.


그럴 때면 짐을 쌌다. 나는 대구로 가야 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KTX역은 참 멀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애 둘을 업고 걸리며 기차에 올라탔다. 그때도 기차 간식 카트는 참 요긴했다. 먹고 싶은 과자를 사서 첫째 손에 쥐어주면 둘째를 안고 있을 시간이 좀 났다. 둘째는 순하긴 했지만 한 번 울면 세상 떠나가게 울었기 때문에 거의 서 있어야 했다. 민폐엄마가 되고 싶진 않았다. 나도 바나나 우유가 먹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렇게 첫째가 방실방실 웃으며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다 보면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UNSPLASH

기차를 타기 전에 이미 몇 호차인지, 좌석은 어디인지, 어느 문으로 내릴 건지, 꼼꼼했던 아빠는 열심히 사전조사를 했다. 마냥 사람 좋은 엄마랑은 달랐다. 아빠는 뭐든 사랑도 구체적으로 베풀었다. 딸이 지금 지쳐있다는 걸 엄마보다 더 예민하게 캐치했다. 기차가 서고 문이 열리면 제일 앞에 아빠와 엄마가 서 있었다. 예외는 없었다. 아빠의 팔은 이미 활짝 벌어져 있었다. 첫째를 덥석 안아들 준비였다.


조부모와 손녀딸의 눈물 나는 상봉이 시작됐다. 아빠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이미 첫째 손녀부터 냅다 납치하듯 끌어안았다. 손녀도 외할아버지라면 몸을 날려 덥석 안겼다. 엄마도 뒤늦게 팔을 벌렸지만 이미 내 품에 잠들어 있는 둘째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얼른 비키라며 나는 휘휘 손짓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늘 허둥대며 만났다.


첫째를 든든하게 안은 뒷모습이 다부진 아빠가 말하는 듯 했다. ‘걱정하지 마라. 집에 가서 너는 푹 쉬면 돼.’ 엄마는 날 보며 내 낯빛부터 살폈다. ‘우야노. 고생 많았쟤. 애들은 안 울었나?’ 하지만, 두 분 다 묻고 싶은 말도 다 묻어둔 채 아이 둘을 챙기며 나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게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 나는 비로소 긴장이 풀려 땀에 젖은 채 아이가 먹다 남은 과자를 베어 물곤 했다. 배가 고픈 것도 잊고 있었던 탓이다. 못 마신 바나나우유가 절실히 먹고 싶어지곤 했다.


시간이 지나 아빠는 점점 노쇠했고, 기차역에 나오지 못하는 나이가 됐다. 엄마도 아빠를 보살피느라 나오지 못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친정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아빠가 없는 빈 집에 엄마를 만나러 간다. 그렇게 시간은 너무 빨리 흘렀다. 요즘 대구 갈 때 나는 나의 기차여행을 지켜주던 간식들이 다 사라진 SRT를 타고 간다. 기차 안에는 더 이상 간식 카트가 없다. 하지만 그 때의 기억이 너무 그리워 나는 미리 역 내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와 과자를 사서 탄다. 입에 과자를 쏙 집어넣으며 창밖을 본다. 1시간 40분. 너무 빠르다. 그러니까 기차 안에 팔던 도시락도 사라졌지. 반찬 냄새가 온 기차간에 진동을 하면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 먹던 그 음식들이 먹고 싶다. 밥 냄새, 삶은 계란 냄새, 마른 오징어 냄새, 김밥 냄새가 섞이던 그 시절. 그건 음식냄새라기보다는 사람냄새였다. 다들 어딘가를 함께 가고 있다는 유대감이었다. 그때가 그리워진다. 애기들 데리고 배고프게 내려가던 기차여행 동안 참 먹고 싶었는데. 그래도 내게 기차 안 간식들은 아빠엄마의 커다란 품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가 주는 휴식이고 위안이었다. 이제는 없는 아빠의 품이 그리워 더 허전하고 배가 고프다. 이제 여유 있게 먹을 수 있는데. 세월은 절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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