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1980년대 대구의 아스팔트는 체감상 지금보다 더 뜨거웠다. 약국이 있는 상가에 가려면 우리 동에서 나와 여러 층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샌들 속 내 작은 발이 데일 것 같아 통통 뛰어올라가던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일곱 살쯤이었던 내 손에 아빠가 천원을 쥐어주며 약국에 보냈다. 안약을 하나 사오라는 간단한 심부름이었다.
나는 어릴 때 싹싹하니 인사를 잘 해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예쁨을 받았다. 약국에 들어서자 약사님이 안약을 건네주며 백 원을 거슬러주었다. 옛날엔 단골가게에서 현금을 내면 백 원 정도 거슬러주던 정서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백 원 동전 한 개를 손에 꼭 쥐고 갈등했다. 날씨는 무더웠고 바로 옆 슈퍼마켓에 가면 ‘아시나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이 돈으로 그걸 사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갈등하던 나는 더위의 유혹을 못 이기고 결국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그 이름이 ‘모르시나요’로 둔갑하던 순간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싹 다 먹고 집에 도착하려면 그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 안 됐다. 너무 빠른 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둥그렇게 동네를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서 내려오는 길. 그 때 아이스크림은 왜 그리 달고 맛있던지. 야금야금 베어 물며 내려오던 길. 일곱 살 탈선의 맛은 짜릿했다. 입을 깔끔히 닦고 손을 탁탁 털며 빵 부스러기 잔해까지 없앴다. 그리고 동 입구로 들어섰던 것 같다. 여리고 서툴렀던 범죄현장은 또 왜 이리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까.
하지만 백 원짜리 거짓말이 불러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아빠는 내가 오랜 시간 오지 않자, 11층에서 밖을 내려다봤고 갈비라도 들고 뜯듯이, 맛있게 ‘아시나요’를 먹으며 내려오는 나를 목격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옷을 털고 입을 닦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전직 형사의 위엄이었다. 형사의 촉은 정확히 사태를 파악했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유도심문이 들어갔다.
“미희야, 안약이 얼마디?”
“안약? 천원.”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고, 아빠는 옆에 놓여 있던 신문지를 둘둘 말았다.
“바지 걷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종아리를 맞은 나는 흐느끼며 죄를 고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어요, 아빠.”
“걷어!”
신문지로 종아리를 때려봤자 얼마나 아팠을까. 하지만 내 마음은 찢어졌다. 아빠는 거짓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교육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백 원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한 건 나인데, 내 손에 쥐어졌던 그 백 원이 그때는 그렇게 미웠다. 아빠에게 거짓말을 해서 혼이 난 기억은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도록 부끄럽게 남았고, 아빠는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오래오래 웃었다.
“엄마, 백 원만!”
이 말이 흔했던 그때 그 시절, 백 원 한 개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문방구의 딱지나 종이인형도 백 원짜리 동전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십 원짜리도 유용하게 지갑에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니 백 원짜리로 살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중에서도 오락실은 백 원짜리가 유난히 기세등등한 곳이었다. 당시 오락 한 판은 백 원이 국룰이었다. 그래서 오백 원이나 천 원짜리를 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꿔주는 동전교환기가 곳곳에 놓여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까지 오락실을 다녔다.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집이 비어있던 날이 더 많았던 낮 시간,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나면 넉넉하게 잔돈을 챙겨야 했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안방 창문 아래 길게 놓인 문갑 서랍을 열면 서랍마다 그렇게 동전이 많았다. 그 때는 현금을 주로 쓰던 시절이어서 부모님은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들을 무겁게 들고 다니기보다는 문갑 서랍에 던져 놓았던 것 같다. 물론 전화로 물어보고 가져갈 때도 있었지만 거기서 티 나지 않게 한두 푼만 가져가는 건 아마 종아리를 신문지로 얻어맞았던 기억이 남겨준 마지막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혹을 이길 수 없었던 건 태생적으로 사람을 홀리게 태어난 동전의 탓이었던 걸로 하자. 그래도 그것 말고는 돈을 몰래 쓴 기억은 없었으니, 그 동그랗고 반짝이는 백 원 몇 개는 오락실에서 충족된 내 외로움의 값인 걸로 변명도 해 보자.
요즘은 신용카드로 돈을 쓱 긁어 쓰는 시절이다. 심지어 핸드폰으로 결제를 한다. 동전은 마트에서 카트 뺄 때나, 혹은 짐 보관소에서나 쓰일 뿐, 보기 힘들다. 그래서 십 원짜리부터 오백 원짜리 동전들까지 희귀한 아이템으로 중고마켓이나 경매 사이트에서 수백만 원까지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1966년처럼 처음 십 원짜리 동전이 나온 해거나, 1975년이나 1981년 같이 유난히 많이 찍어내지 않아 유통이 적던 해의 십 원짜리 동전들은, 물론 미사용 기준이지만,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1998년의 오백 원짜리처럼 외환위기에 외국 국빈 접대용으로만 사용된 동전은 희소성이 상당하다고 한다. 오만 원짜리 한 장은 쉽게 쓰면서, 십 원짜리, 백 원짜리 동전 한 개에 환호하는 세상이라니. 세상이 너무 여러 바퀴 돌았다. 어지럽다. 내게 소중한 건 그런 희귀한 동전이 아닌데. 흔한 건데.
은전 한 닢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피천득의 소설 속 걸인이 생각난다. 나는 내가 지금 수중에 가진 금을 다 팔아서라도 그 때 그 여름 아빠의 손에 다시 돌려주지 않았던 그 백 원짜리 동전이 갖고 싶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팔았던 내 양심과 백 원을 사오고 싶다. 이제 나는 어디 식당에서 쓰다 남은 냅킨도 들고 오지 않는 사람인데.
생각해보면 아빠는 아마 그 때 그 창가에서 내가 아이스크림 먹던 장면을 보면서 웃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내가 착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빠는 내가 백 원을 돌려줘도 다시 내게 심부름 값으로 백 원을 쥐어줬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동전이 기억에서 자꾸 희미해지는 게 싫어서라도 다음에 아빠 산소에 갈 때는 백 원 한 개를 들고 가야겠다. 예쁘게 올려놓아야겠다. 아빠가 얼마나 웃을까. 진작 돌려드릴걸. 나는 영원히 아빠 앞에서 여전히 종아리를 걷은 일곱 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