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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awer Nov 30. 2019

잘 다니고 있다는 거짓말

피노키오가 돼버린 신입사원



“회사생활 어때요?”

신입사원이 직장 선배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질문 1위.


“어떻긴요 정말 X 같죠.”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좋아요. 잘 다니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나. 처음엔 그렇게 직장 선배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가족, 친척들에게도 잘 다니고 있는 척 그들을 속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에게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거짓말하는 처지가 됐다. 이렇게 습자지처럼 얇은 기만을 떠는 것만으로도 나는 신경이 끝없이 곤두섰다. '잘 다녀야만 해, 퇴사라는 건 있으면 안 돼.' 회사가 싫고 일이 싫은 게 큰 비밀이라도 되는 냥 나는 비밀을 지켰다. 내 마음의 소리를 무시했고, 내 구슬픈 울음을 듣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나는 진실을 숨긴 거짓말쟁이가 됐다. 회사에 출근해 매일 거짓말쟁이의 눈을 통해 팀장님, 과장님, 대리님을 바라봤고 두 갈래 뱀의 혀로 나 자신과 얘기했다. 추했다. 그런 내가 너무나도 추했지만, 퇴사는 나에게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됐다. 하루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다 눈물이 났다. 상사에게 깨진 날도 아니었고, 업무에서 실수를 한 날도 아니었고, 보통날이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파티션이 다행히 나를 가려주어 아무도 내 눈물을 보지는 못했고, 나는 재빠르게 휴지로 눈물을 거뒀다. 엉겁결에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나를 저녁 밀물 때 바닷가에 버려진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간 내가 나 자신을 속여왔던 감정들을 마주했다. 나는 회사에서 늘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나는 뼛속까지 지쳐있었다. 버틸 수밖에 없어서, 버티는 데 바빠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갑작스레 흘린 눈물 한 방울이 겨울바다의 차가운 바람처럼 내 뺨을 갈겼다. 더 이상은 참고 싶지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헤엄치는데 지친 나를, 파도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나를 구해야 했다. 구명보트 뱃전으로 몸을 내밀어 나를 안전하게 건져 올려줄 수 있는 건 퇴사, 퇴사뿐이었다.




아마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이따금씩 "팀장님, 드릴 말씀 있습니다." 라고 퇴사 운을 떼보는 나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다 팀장님과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기면, 이 기회를 덥석 잡아 '저 퇴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한 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에선 땀이 나기 시작했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제대로 된 타이밍을 찾아 다시 말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생각의 멱살을 잡아서 안전한 경로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몰라' 라는 생각에 퇴사하겠다는 말을 뱉어버렸다. 아니, 말이 생각보다 먼저 나갔다. 팀장님은 왜 퇴사를 결심하게 됐냐고 물었다. 더 이상은 속이기 싫다고 답했다. 회사를 속이고 싶지도,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다고.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더 많았지만, 퇴사 사유에도 말해도 될 것과 말하면 안 될 것이 존재하기에 몇 개는 또 속으로 삼켰다.


거짓말이 주는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는 신입사원에서 퇴사자가 되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처럼, 회사 사람들은 나의 거짓말을 다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거짓말을 눈감아주고 잘 지내는 신입사원으로 봐주는 것도 그들이 나에게 해준 최선의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로 길어진 피노키오의 코는 요정의 눈을 찌를 정도로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거짓말로 길어진 내 죄책감은 나를 찌를 정도로 위험했다. 착하고 용감한 행동을 한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요정처럼, 비로소 내가 피노키오에서 사람이 되게 만들어준 것은 '퇴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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