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으로부터의 독립
주말 오전, 오늘도 어김없이 동거녀의 유튜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방탄소년단의 찐팬인 동거녀는 신실한 아미로서, 주말마다 방탄 노래를 찬송가처럼 틀어놓고 그들의 근황을 미사 보듯이 열심히 챙겨본다. 덕분에 나는 방탄소년단의 근황을 그 누구보다 빠르고 투머치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는 윤기가 나오고 있었고, 그는 오랜 꿈이었던 음악 여행을 떠나는 다큐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악 여행이라니. 전 세계 여러 도시의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음악을 통해 새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니. '말만 들어도 졸라 멋있네...' 속으로 생각하며 다 늘어난 티셔츠를 괜히 멋쩍게 고쳐 입었다. 초라한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들의 젊음과 성공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은.
한 때는 나 역시 아미였고, 그들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지금처럼 범접할 수 없는 월드스타가 되기 전, 무명이었던 그들은 내게 친구보다 가까운 존재였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원석을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져 그들을 매일 찾아보다 잠들곤 했었다. 그래. 아직은 젊음이 무기이고, Young Forever를 외쳐도 괜찮았던 나이에는 방탄이 꽤 위로가 됐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젊지 않고, 내 나이는 무기가 되지 못하며, Young Forever를 외치기엔 좀 서글퍼진 나의 역사들이 생기면서부터 방탄소년단은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는 나의 여드름이 되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월드스타를 보면서 열등감을 느낀다는 그 자체가 유치하고 찌질하고 황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와 콘텐츠들이 쏟아질수록, 상처에 염산을 들이부은 것 같이 아프고 쓰라렸다. 나는 대체 뭘 질투하는 걸까? 뭘 부러워하는 걸까? 이 열등감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릴 적부터 이상형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선 '이상형'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이성상'을 뜻하지만, 나는 늘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이상형으로 떠올렸던 것 같다. 나르시즘은 자신 스스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현상이라던데, 그렇다면 나는 나르시즘이 아니라 너르시즘이 꽤 심각하게 있었다. 너르시즘이 무슨 뜻이냐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자니 있는 그대로의 나는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내가 되고 싶은 나, 즉 이상형과 유사한 이미지의 인물, 외모, 분위기, 음악, 글 등을 수집해 그걸 아끼고 사랑해 왔던 것을 말한다.
그 결과, 현실의 나는 구박데기 취급하고 되고 싶은 나는 신줏단지 모시듯 살아온 꼴이 됐다. 실존의 나를 외면하니 외로워지고, 허상의 나는 나를 더 외롭게 하기만 했으니. 아, 어리석고 슬픈 너르시즘이여...
나의 너르시즘에는 방탄소년단도 있고, 아이유도 있고, 레아 세이두도 있었다. 만화가는 천계영, 앙꼬, 오사 게렌발, 작가로는 임경선, 요조, 마스다 미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다들 '말만 들어도 졸라 멋있네...' 하는 면모가 있다는 것. 예술을 쫓고, 그러나 허세가 없고, 성실하게 임하며, 거기에 인생을 던지고, 온몸으로 표현하고, 용감하고 솔직한, 자기 철학이 있는 그런 사람들.
펜 한 자루 들고 스케치 여행을 떠나는 나를 떠올려본다.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데로 걷고, 눈에 보이는 걸 그리고, 사람들과 교류한다. 내가 꿈꾸던 그 멋진 장면, 이제는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가 온 것 같다. 아티스트들을 만나러 음악 여행을 떠난 민윤기처럼 대단하고 멋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그런 다큐는 찍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감동의 파이만큼은 그리며 살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게 단 몇 사람에게 가닿을 정도의 작은 파이일지라도.
그토록 수많은 너를 좋아했던 나의 너르시즘은 이제 그만 리스펙의 영역으로 넘기고, 손바닥만 한 파이 속의 나를 만나러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