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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Aug 10. 2020

폭우와 나폴리탄 파스타

SF적으로, 영원히   있을 것처럼



장마가 계속되는 밤이었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제트에게 전화가 왔다.


나폴리탄 스파게티 재료를 사러 나오는 길에 생각나서 걸었다고 했다. 제트는 비가 오는 날 걷는 걸 아주 싫어해서, 빗방울이 조금만 떨어져도  '우천 시 만남 취소'라는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그런 제트가 비 오는 날 파스타 면을 사러 나왔다는 것은 폭우가 내리는 이 밤에 고양이를 찾으러 나왔다는 뜻이었다. 삼십 분 뒤에 제트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이브이 죽었을 것 같아."


제트는 옆 좌석에 앉자마자 비에 잔뜩 젖은 파스타 면을 털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고양이를 잃어버린 날에는 어두운 방에 생선처럼 옆으로 누워서 큰 소리로 울어놓고. 그래 놓고 저런 소리는 심드렁하게 했다. 이브이가 왜 죽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거 봤잖아. 고양이가 실종된 다음 날, 우리는 와우산로 아래에서 분명히 이브이를 보았다. 제트는 이브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키만 한 담을 넘어 모기 소굴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결국 이브이는 컴컴한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벌써 다른 고양이들에게 물어뜯겼거나 굶어 죽었을지도 몰라."


그게 아니고서는 내가 이렇게 찾는데, 그 애가 그 날 나를 봤는데 이렇게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제트가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물방울 맺힌 파스타 면을 툭툭 털 때마다 그 말들이 물방울처럼 튀어나가는 것 같았다. 고양이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보자고 했지만 제트는 단박에 거절했다. 안돼. 이브이를 넣을 캐리어도 간식도 안 챙겨 왔어. 이브이를 데려갈 키트가 없단 말이야. 만약에 마주쳤는데 이브이를 데려가지 못한다면. 그게 더 끔찍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리는 텅 비어있는 홍대 거리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라 술집과 게임장 말고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커피 말고 오랜만에 DVD라도 볼까 했는데, 제트가 새카만 방탈출 간판을 가리켰다. 우리 저기 가자. 밤 12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방탈출 문이 왜 열려있지? 의아하긴 했으나 그러자고 했다. 우리가 선택한 방은 소공녀의 방이었다. 우리는 좁아터진 다락방과 미로 속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덧셈 뺄셈을 하고, 잘 모르는 곳에선 다람쥐처럼 같은 곳만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문제를 풀었을 때는 희망이 보이다가도, 다시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오만상을 썼다.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다 풀지도 못했다. 그게 지금 내가 사는 모습하고 너무 똑같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는데, F가 찍혀있는 성적표까지 받고 나니까 기분은 더 더러워졌다.





"거지 같아. 4만 원 내고 한 시간 동안 농락당한 것 같아."

"이걸로 오천 원짜리 연금복권을 샀으면 8장이나 샀다."

"그래. 타로카드는 4번이나 볼 수 있어."

"엽떡은 2번 시켜먹을 수 있어."

"그런데 이제 그거 다 끊기로 했잖아. 우리."

"그래. 연금복권도 타로카드도 엽떡도 이제 끊기로 했지. 부질없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냥 4만 원 내고 1시간 동안 다른 부질없는 거 했다고 생각하자."

"응."


그러고 나니까 진짜 부질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차 안으로 돌아와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부질없는 기분을 잊기 위해 더 부질없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 과학자가 그러던데, 이 세상에는 영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쯤은 있대. 그중 한 명이 언니라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이 모습 그대로 계속 살아야 하는 거야? 그건 좀 싫은데. 그럼 성형하면 되잖아. 어차피 언니를 알던 주변 사람들은 다 죽을 건데, 천 번쯤 얼굴 성형해도 알게 뭐야. 그런가. 그런데 그러면 신분증은 어떻게 해. 그런 것쯤은 위조할 수 있게 돈을 벌어둬야지. 한국에서 신상정보 없이 어떻게 취업을 해서 돈을 버냐. 그걸로 이미 영생이 불가능하겠다. 애초에 생체실험으로 끌려갔을걸.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가 그쳐있었다. 제트는 다 마신 컵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언니. 내가 만약 영생을 한다면, 언니가 나의 첫 번째 베스트 프렌드였다고 기억할게. 언니 죽는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언니 죽음을 지켜볼 테니까."

"어. 그럼 내 생에 베프는 너 하나뿐인데, 너는 몇 천명씩 사귈 거 아냐. 그건 좀 싫다."

"하지만 난 몇 천명의 죽음을 봐야 하잖아. 언니는 내가 죽는 장면을 몇 천 번씩 볼 수 있어? 한 번 죽는 것보다 영원히 사는 게 더 불쌍한 거니까 좀 봐줘."

"그런데 우리 이런 대화를 왜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는 거야."

"바보야. 영원히 살지 못하니까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 대화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그래. 우리의 숙제는 영원히 살지 못하는데도 살아야만 하는 SF적인 것이니까. 

고양이가 5일째 폭우 속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SF적으로 살아남아있길 기대해보자.


"비도 그쳤는데 파스타 먹고 가. 혼자 먹으면 맛이 없단 말이야."


제트는 그 날 밤, 케첩과 핫소스를 잔뜩 때려넣은 나폴리탄 스파게티와 와인 한 병을 다 먹고 나서 또 울었다. 좀처럼 잊지 못할 야식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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