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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는MK Mar 08. 2021

노인과 오만과 편견


노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보다 내가 더 할머니를 사랑했을 것이다. 이건 분명하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을 두고두고 서운해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도 ‘저것이 고추가 달렸어야 했는데...’ 그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러면서도 여자아이인 내가 머리를 기르지 않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선머슴처럼 하고 다니지 말라며 짧은 머리카락을 가자미눈으로 흘겨보곤 하셨다. 게다가 초등학교 5학년인 내가 얼마나 뚱뚱했었는지 나보다 더 잘 기억하고 계셨다. 거대한 오리처럼 뒤뚱 뒤뚱 걷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까 키가 껑충 커지고는 그 많던 살이 쑥 빠졌노라고, 해마다 친척들에게 도깨비 설화 들려주듯이 그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너무 미웠다. 너무 미워서 온 힘을 다해 애교를 피웠다. 그 때 내가 할 줄 아는 공격은 더 사랑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싫은 얘기를 할 때마다 그 입술에 뽀뽀세례를 퍼부었고, 5학년 저팔계 시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숨이 막히게 꽈악 끌어안고 품에서 놔주지 않았다. 그러면 할머니는 징그럽다고 저리 가라며 저항하다가 나중엔 웃고 말았다. 그렇게 열심히 공격한 결과, 맏이인 우리 언니와 막내인 사촌 동생 보다 내가 더 예쁨 받는 손녀가 되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옆구리에 끼우고 누워야만 낮잠을 잘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할머니를 미워하다가 진심으로 사랑해버렸다. 대체 무슨 개연성으로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히 말할 수 있다. 할머니보다 내가 할머니를 더 사랑했을 거라고. 나는 할머니가 남자였으면 좋겠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으니까. 할머니가 거대한 오리처럼 뚱뚱했어도, 머리가 너무 길어서 상투를 틀고 다녔어도, 혹은 빡빡 머리였어도, 그랬어도 ‘우리 할머니’였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당신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조선시대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었어도, 심지어 외계인이었어도 나는 지금처럼 당신을 사랑했을 테니까.  



갑자기 이 생각이 든 것은 어떤 노인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수업에 늦을까봐 헐레벌떡 뛰어가던 도중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뻔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노인은 내가 짐을 다 실을 때 까지 열림 버튼을 계속 눌러주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노인을 쳐다봤는데, 휴대폰으로 트로트 영상을 쩌렁쩌렁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노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었다.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을 끼우거나 볼륨을 줄이는 건 당연히 지켜야 할 상식이다. 하지만 이어폰을 챙기는 노인은 흔하지 않다. 보청기를 챙기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들이 내가 아는 상식을 지키기엔, 나이와 성별과 결혼 유무에 대해 묻지 않기엔, 내가 받고 싶은 존중이 무엇인지 알기엔, 너무도 다른 시간을 살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도 나만큼이나 존중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에도 노인은 열림 버튼을 계속 눌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미스터 트롯 역시 쩌렁쩌렁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노인에 대한 생각과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 묘하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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