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는MK Mar 09. 2021

상자 속의 환상

 

오래된 상자를 정리했다. 그러다 앨범과 색이 바랜 편지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내 글씨와 똑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너무나 바빠서 허둥대던 시간들, 뜻하지 않은 일에 갈길을 잃고 방황하던 시간들, 마음은 수천 갈래로 갈라지고 사회에 대한 환멸과 혐오감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 험한 세상에도 진실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요, 스물한 살의 철없는 아이가 서른 살의 커다란 아저씨를 가슴속에 품었답니다. 그의 진심을 사랑했고, 그의 가치관, 처세술에 경이감을 느꼈고, 그의 머리카락, 웃는 모습, 말하는 입 모양, 담배 피우는 모습, 바쁜 시간들 조차 사랑하고 싶었답니다.> 우리 엄마의 글씨였다.


나는 엄마가 엄마이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가 처녀일 때 만날 수가 없게끔 만들어진 사람이니까. 그런 면에서 엄마는 내게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이방인처럼 느껴진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엄마는 아주 낯설고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물한 살에 아홉 살 많은 남자를 사랑해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너무나 신기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우리 엄마였고, 빛 바랜 편지 수십 통에는 내가 모르는 낯선 시간이 있었다. 그것이 나와 똑같은 글씨체로 또박 또박 적혀있었다.


내가 읽은 것은 무엇이었고, 엄마가 쓴 것은 무엇이었으며, 상자에 쌓여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노인과 오만과 편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