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앞자리만 고집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아이 눈에는 기사 아저씨의 운전이 신기했고,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의자에 온기가 퍼지기도 전에 일어서야 했다. 멈춰서는 정류장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대개 할머니들은 무릎 위에 앉히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1시간에 한 대 있을까 말까.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도 기사 아저씨의 재량이었다. 간발의 차로 놓치면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정류장에 열 명쯤 모이면 그제야 저 멀리서 버스가 모습을 보였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버스에 오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는 보따리와 수레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기사 양반 왜 이리 늦게 왔어.’ 타박이 아니라 인사치레와도 같은 말이 오갔다. 버스는 만남의 장과도 같았는데, 조금은 정다우면서도 서글픈 대화로 가득했다. 이내 버스는 도로를 굽이굽이 넘어가 마을의 구석구석을 돌았다. 마치 긴 여행길과도 같았다. 그렇게 조용히 노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에 도착했다.
서울에 올라와 눈치라는 게 생기고 나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향했다. 버스 안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으면 앞자리와 뒷자리, 그러니까 늙은이와 젊은이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게 보였다.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그러니까 나도 그 중간의 어디쯤이려나.
무심코 경계를 허물던 *어린이는 어색하게 버스 안을 바라보았다. 무릎에 닿아 생긴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어린이 :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