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토박이인 내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대학생활 중에 했던 여행기자단 발대식에서였다.
그와 나는 서로의 첫인상에 대해서 솔직 담백하게 추억하며 이야기하곤 하는데, '아 저놈이랑은 절대로 친해질 수 없겠구나'라고 서로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강렬하게 19금 드립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문어와 같은 팝핀댄스로 모두의 이목을 끈 인싸인 척하고 싶어 하던 아싸인 그는, 찐 아싸이지만, 인싸인 척하고 싶어 하는 나와 동류라는 걸 인식함과 동시에 친해졌다.
명불허전. 끼리끼리 모인다. 유유상종. 코드가 맞는 사람. 이게 그와 나였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한 지역에서만 계속해서 사회생활을 해왔으며(울산과 광주), 제법 안정적인 집안이라 학자금 대출도 없었다. 만화책 보는 것을 좋아했고(선호하는 장르마저 비슷), 대학교의 학과마저 비슷한 생명공학 계열이었다. 또한 공통의 주제로 엮인 여행기자단을 함께했으며, 그 또한 첫 직장으로 나와 같은 바이럴 마케팅 회사를 선택해서 다녔으며(같이 ㅈ소를 경험했다), 둘 다 공무원 시험에 신나게 자빠졌다. 심지어 각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집은 1301호이었고 그의 집은 1401호였다.
그와 나는 여행도 많이 다녔다. 여행기자단 활동을 통해 영주, 경주, 군산, 익산 등 여러 도시를 다녔으며, 친구와 함께한 해외여행의 동반자이기도 했다(동갑내기 여행기자단 친구 4명이서 다녀왔는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여행-베트남). 그리고 오사카의 여행에서는 오덕화 되어 덴덴타운에서 도라에몽 굿즈를 사고 갓챠머신에서 포켓몬 뽑기를 하면서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대만여행에서는 폭포에 놀러 갔다가 예산절감을 위해 택시를 포기해서 1분 차이로 기차를 놓쳐 문 닫은 스펀 기차역에서 1시간 동안 떨기도 하였으며, 가오슝의 치친섬 여행 중에는 의견충돌로 싸우고 헤어지기도 하였지만 금방 잊고 다시 만나 빙수를 찾아 헤매며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그런 파트너였다.
@2015. 대만 타이페이 스펀폭포에서 나와 그.
그의 이야기를 잠시 풀어보자면, 그는 첫 ㅈ소기업에서 퇴사 후 개인병원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부모님의 압박이었는지 PEET를 공부해 약학대학을 준비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후 공무원 시험을 3년반 정도 준비하였지만, 작년 국가직 낙방 이후 과감히 포기를 선언하며 국비지원인 인공지능사관학교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하지만 잘 다니던 중 기업PR을 온 회사에 꽂혀 회사의 이사에게 관심을 강하게 어필해 인턴으로 취업하게 되면서 국비지원을 수료치 못했다. 그가 계속 그 회사에 다니면서 자리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인생은 생각보다 순탄치 않았다. 인턴으로 뽑은 그 회사는 단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A군을 이용해 뽑았으며, 수습기간 만료와 동시에 그에게 해고를 선언했다. 그는 현재 여전히 방황 중이다.게다가 잠시 운영했었던 블로그가 의외의 돈벌이가 돼서 의외의 부수입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영향인지 첫 직장의 영향인지 블로그의 집착은 여전히 떨치지 못한다.(이 길은 아니야 친구야)
나는 많은 ㅈ소기업들을 경험하면서 그가 걸어온 길들이 나와 유사한 길이 많다고 생각했고, 내가 최근 10여 년 만에 ㅈ소기업을 탈출하여 지방공기업에 안착했을 때 내가 선택한 가이드라인을 그에게 보여주었지만, 그는 최근 다른 길을 선택해 버렸다. 나 역시 늦게 이 길을 알았기에 뒤늦게 그에게 이 길에 대해 안내했지만, 역시 끼리끼리라던가. 친구의 조언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건 매한가지였다.(이래서 친구)
그는 요즘 여전히 우울하며 늘상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10년 전 패기 넘치게 19금 드립을 치던 그는 요즘엔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 또다시 인강을 결제한 그지만, 팔랑귀에 의지박약인 그가 쉽사리 다시 도약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가 나와 유사한 길을 계속 걸어왔고 친구는 닮고 끼리끼리 엮이기에, 그 또한 10년 만에 ㅈ소기업을 탈출한 나처럼 곧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