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 남 주나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이라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 던져진다. 유아기에는 오감을 통해 세상을 직접 만지고 맛보며 '경험'이라는 원초적 학습을 시작한다. 이후 유년기에 접어들면 부모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립하고, 정식 교육 과정을 거치며 교과서와 선생님이라는 권위 있는 가이드로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지식을 습득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흔히 '배움'과 '경험'을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이 두 단어가 내포하는 본질적인 층위는 사뭇 다르다. 흔히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행위를 배움이라 규정하고, 스스로 부딪히며 깨닫는 것을 경험이라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자가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굳이 배움이라 표현하기를 주저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배움이라는 단어 속에 '타자의 개입'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배움과 경험이 가지는 역동적인 관계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배움은 본질적으로 '지도'를 습득하는 과정이다. 지도는 앞서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남긴 정답의 기록이다. 사회가 제공하는 정규 교육과 참고서, 그리고 부모의 재력으로 넓혀진 다양한 사교육의 통로들은 더 정교하고 상세한 지도를 제공한다. 이 지도는 시행착오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이미 검증된 '정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따라서 배움은 의도적이며 구조적이고, 때로는 수동적이다. 반면 경험은 그 지도를 들고 실제 '지형'을 밟아 나가는 행위다. 지도는 산의 높이를 알려주지만, 경험은 그 산을 오를 때 차오르는 숨 가쁨과 발끝에 전해지는 흙의 질감을 알려준다. 경험의 세계에는 미리 정해진 정답이 없다. 오직 수많은 문을 두드려본 후에야 얻을 수 있는 '해답'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정답과 해답의 차이는 과학의 역사와 인공지능의 발전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정교한 지도, 즉 논리와 규칙을 전수받는 '배움'의 방식에 의존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딥러닝은 패러다임을 바꿨다. 알파고와 같은 현대의 AI는 모든 수에 대한 정답을 배우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수백만 번의 대국을 치르며 '경험'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해답은 때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수를 제시한다. 이는 배움이라는 지도가 가르쳐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수십 년간 기존의 지식을 배우며 지도를 익히지만,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문미답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 그 지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때부터는 오직 실험과 실패라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다시 지도의 새로운 페이지가 되어 다음 세대의 배움으로 전수된다.
경험은 자신이 스스로 겪는 것이며, 보통은 겪어봐서 아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움은 정답의 길로 가지만, 경험은 해답의 길로 간다. 어떤 것이 해답인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문을 두드려 보는 수밖에 없다. 두드리다 보면 어떤 정답의 길로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를 '시행착오'라고 표현한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르기 때문에 해답을 구하다 보면 비로소 정답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과학에서는 늘 그러하다. 미지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배움과 경험은 본질적인 접근법부터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배움이 지도를 제공한다면, 경험은 지형을 탐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스스로 깨우치는 자가학습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것은 지도와 지형이 만나는 '합일'의 과정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 앞에 놓인 지도를 자신이 실재하는 경험과 대조하며 수정해 나가는 고독한 항해와 같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단순히 지식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지식을 '운용'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배움이 우리에게 지도를 쥐여준다면, 경험은 그 지도가 틀렸을 때 당황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적응력을 가르쳐준다. 부모의 재력이 배움의 통로를 넓혀줄 수는 있어도, 그 통로를 걸어가며 겪어야 할 시행착오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비싼 지도를 가졌더라도 직접 걷지 않는 자는 지형의 변화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배움과 경험은 어느 하나가 우월한 관계가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순환의 고리다. 배움 없는 경험은 무모한 방황이 되기 쉽고, 경험 없는 배움은 실체 없는 관념에 머물기 쉽다. 타인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의 지도를 익히되, 그 지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발로 지형을 확인해야 한다. 정답이 있는 문제에서는 배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되, 해답이 필요한 인생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는 기꺼이 모든 문을 두드리는 시행착오를 감내해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는 즐거움, 즉 경험이 배움으로 승화되는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들고 있되 지형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배움과 경험의 파도 속에서 잃지 말아야 할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