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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Mar 22. 2023

반 백 살에 미용이라니

“어머나!”

“쌤, 손가락 베었어요? 어디 봐요.”

선생님이 달려오셔서 손가락을 살펴보셨다.

살짝 스친 것 같았는데 피가 많이 나고 있었다.

선생님은 데스크로 가서 약과 밴드를 가져오셔서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셨다.

“조심하셔야 해요, 가위가 엄청 날카롭거든요. 천천히 감각만 익히신다 생각하세요.”

자리로 돌아와 다시 가위를 들다가 내려놓았다.

밴드로 감은 왼쪽 검지가 아려왔다.

문득 어제 엄마와의 통화가 상기되었다.

미용학원에 등록했다고 했더니, 엄마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미용사냐며 따면 미용실이라도 차리려고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고, 따서 아이랑 남편 머리도 잘라 주고, 어르신들 미용 봉사도 다닐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야, 야, 그동안 애 키우느라 고생만 했는데 이제 좀 집에서 쉬면서 몸이나 돌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냐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삼십 대 후반, 늦은 결혼을 해서 서른아홉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공부만 하다가 강사로 일하다 보니 집안일이며 육아에 대해 정말 무지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상태로 칠 년을 육아만 했다.

그사이에 나는 없어지고, 그냥 늙어 가는 아줌마만 남았다.

가끔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은 시간엔 온전히 나를 위해 즐기며 살았던 예전의 내가 너무나 그리웠지만,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이제 오전의 자유 시간이 나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

처음엔 그 시간이 적막하다고 느껴질 만큼 이상했는데, 점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났다.

미용은 그중 하나였다.

결혼 전, 3년 동안 복지관에서 어르신 식사 배달 봉사를 했었다.

봉사를 하면서 내가 어르신을 돕는 게 아니라 어르신들을 통해 그동안 사회생활에 찌들어 잊고 살았던 인간에 대한 따스함, 삶의 의미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봉사는 적립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 테고, 그때를 위해 적립을 하는 활동이 봉사였다.

사회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는 거였다.

어르신들에게 가장 유용한 도움이 미용 도움이었다.

기회가 되면, 배워서 어르신들 이발을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시간이 생겨서 실행에 옮기게 됐다.

아침반엔 스무 명 남짓한 수강생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이삼십 대였고 사십 대는 딱 두 명이었다.

손을 쓰는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젊은이들과 비교해 손이 느렸다.

몸이 맘대로 따라 주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은 급기야 손을 베고 만 것이다.

엄마 말대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모한 도전인가 싶기도 했다.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고 운동이나 하면서 비로소 만끽하게 된 자유를 누리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때가 곧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때엔 또 얼마나 후회를 하게 될 것인가.

손을 베이고 의기소침해진 마음에 다시금 용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괜찮아.

다시 해보자.

나는 오른손에 다시 가위를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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