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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Jul 29. 2023

그릇은 바꾸라고 깨지는 것

우리 집 설거지 담당은 남편이다.

남편이 유일하게 담당하는 집안일이기도 하다.

신혼 초엔 모든 집안일을 나 혼자 했다.

남편은 부엌에 남자가 들어가면 큰일 나는 집안에서 사십이 넘도록 형수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당연히 음식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나도 결혼하기 전까진 손에 물을 묻힐 일이 없었다.

엄마가 다 해 주셨으니까.

결혼하고서 두 사람 중 하나는 살림을 해야 하는데 집에 있는 내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의 육아까지 내가 전담하게 되자 그때부터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음식은 내가 만드니 당신은 뒤처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지 않아? 하고 물으니 그러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지금껏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남편은 설거지를 꼼꼼하고 깨끗하게 하는 편이다.

물론 세제를 엄청 많이 쓰고, 마지막에 개수대 안 보이는 곳까지 수도꼭지를 빼서 깨끗하게 닦아주고 물을 꽉  행주로 말끔히 닦아내는, 완벽한 설거지를 하면 좋으련만 그것까지 기대하기엔 무리이다.

그냥 그릇을 말끔하게 헹궈서 건조대에 올리는 것까지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10년의 결혼생활 동안 남편이 설거지를 담당해 오면서 지금껏 깨 먹은 컵과 그릇이 참 많다.

나는 그릇에 큰 관심을 쏟거나 플레이팅에 열을 올리는 스타일이 아니기에 우리 집에서 사용되고 있는 식기들은 고가가 많지 않다.

모두 지극히 실용적이고 심플하며 너무 무겁지 않은 제품들이 대다수이다.

그렇기에 남편이 그릇을 깨리더라도 아까운 적이 없었다.

신혼 초부터 써 온 4인용 밥공기, 국공기 세트 중 3개의 밥그릇이 깨지고 내가 쓰는 것만 남았다.

아이는 따로 아이용을 쓰니 세트 중 3개의 밥그릇이 깨지고 짝 잃은 국그릇만 남았다.

물론 이것 말고 손님용으로 가볍게 쓰는 밥공기도 서너 개 없어져 버렸다.

머그컵도 색색별로 10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 다 깨지고 두 개만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꼭 남편의 밥공기만 깨졌다.

본인도 너무 신기해했다.

이렇게 그릇이 깨진 것은 이제 새로운 그릇을 영접하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이참에 4인용 세트를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만들어 수입하는 도자기 세트였다.

원래 쓰던 다른 것들과도 무난하게 잘 어울리는 거라서 구매한 것이다.

10년 만에 새로운 밥공기로 밥을 먹을 생각에 조금 설렜다.

국공기, 밥공기 총 8개의 그릇이 도착했다.

각기 고유한 빛깔이 은은하게 돌면서 반지 윤기가 도는 것이 참 예뻤다.

택배가 도착해서 꼼꼼하게 포장된 그릇들을 꺼내서 불량 유무를 확인하고 스티커를 제거하고 깨끗하게 씻어 건조하려고 했다.

하나씩 조심조심 씻어 건조대에 올리다가 손에서 샤르르 미끄러지면서 하나를 놓쳐버렸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깨져 버렸다.

네 가지 색상 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그린빛이 나는 밥공기였다.

그걸 남편 그릇으로 주고 나는 핑크, 아들은 블루 색상을 쓰려고 했는데.

내가 조심성이 이렇게나 없는 사람이었나 화가 났다.

나머지 7개를 보면서도 아까운 생각뿐이었다.

구입처에 문의하니 자기네는 세트만 판매하고 있어서 단품 구매가 불가하다고 했다.

온라인백화점에서 단품을 판매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깨진 그릇과 동일한 색상으로 밥공기를 하나 더 구입했다.


3일이 지나 장마가 계속되던 기간에 드디어 다시 또 하나의 밥공기가 배송되었다.

조심조심 택배 상자를 열고 뽁뽁이에 감긴 그릇을 꺼내 보았는데,,,

오! 마이 갓!!!!!!!!!!!!!!

정확히 가운데가 칼로 자른 듯 잘라져 있었다.

택배상자엔 파손우려가 있는 상품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배송과정 중 소중히 다뤄지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일단 사진을 찍어 두고 다시 뽁뽁이로 감싸서 상자에 넣어놓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니, 반품교환 접수를 하라고 했다.

택배 아저씨가 다시 회수를 해서 확인을 하고 후속 조치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내 손에 스치듯 왔던 새 밥공기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은 임시로 베이지색 공기에 밥을 먹고 있다.


잘 쓰던 그릇이 한순간에 깨지는 것은 "나의 쓰임은 여기까지예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세요."라는 의미라고 내 식대로 해석하고 있다.

정말로 아끼던 컵이나 그릇이 깨져 버리면 두고두고 아쉬워하게 된다.

특히 그것이 같은 걸로 대체할 수 없는 한정판이라든지 수제 도자기일 때 더 그렇다.

내가 사는 지역은 도자기로 유명하다 보니 도예촌에 구경 갔다가 예뻐서 업어 온 장인의 도자기들이 몇 개 있다.

그것들은 평상시엔 절대로 꺼내 놓지 않는다.

또, 아이가 일일 체험을 통해 물레를 돌리고 그림을 그려 구운 접시도 있는데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소중한 생각이 든다.

그것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두 개의 도자기 그릇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내 덕질의 배우가 도자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연습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배우가 물레를 돌려 만들고 가마에서 구워 완성했던 것을 판매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잽싸게 구매한 것이다.

초기 연습용으로 만들었던 것이라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지만 이것은 지극히 소수의 팬들만이 지니고 있다.

그냥 파기했어야 할 것들을 구워서 판매를 한 도자기 업체는 정말 상술이 끝내주는 업체였다.

누군가 배우가 만든 도자기를 판매한다고 글을 써서 알아보니 기획사에서도 모르게 판매를 한 것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회사에서 업체에 항의를 해서 판매가 종료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서울에 사는 덕후들 몇이 도자기를 구입했고, 혹시 몰라 내 거까지 구입했다며 보내줘서 갖게 된 것이다.

도자기값은 덕후의 계좌로 입금을 해 주었다.

그런 경로로 내 손에 오게 된 이 도자기를 볼 때마다 뿌듯하다.

전해받는 과정에서 왼쪽 그릇은 이가 빠지기도 했지만 나는 이 도자기가 참 좋다.

완전 초자가 한 물레질이어서 모양도 제대로 잡히지 못했고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언젠가 저 그릇을 밥그릇으로 쓸 날이 올까

너무 아까워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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