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드레 Sep 07. 2023

유로지비

요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다.

예전에 읽고 한참이 지나 다시 읽어 오다가 '유로지비'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를 낳은 어머니 리자베타 스메르쟈쉬차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용어이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백치인데, 사계절 내내 저고리 한 벌만 걸친 채 마을을 돌아다니고, 음식도 좋은 것은 먹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만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이 가여워서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좋은 고기를 줘도 그것들은 남에게 다 줘 버리고 헐벗고 궁색하게 살아가는 광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호색한이자 악인의 표상인 표도르에게 겁탈을 당해 아이를 임신하고, 스메르쟈코프를 낳고는 죽게 되는 불쌍한 여인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표도르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며 평생을 모욕과 멸시 속에서 살다가 결국은 자신의 친부인 표도르를 죽이게 된다.


'유로지비(유로지브이)'라는 단어는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들 속에도 등장하는데, '성스러운 바보, 바보 성자'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미친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겉으로는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내뱉는 러시아 정교의 고행자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여러 종류의 인간 유형들이 등장한다.

일생을 탐욕적이고 자신의 정욕만을 쫓아 살아온 천박하고 악한 표도르,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첫째 드미트리,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자신의 지적 수준과 교양을 높여 엘리트의 반열에 오른 둘째 이반, 숭고한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는 셋째 알료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갈아 온 사생아 스메르쟈코프.

아버지인 표도르를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신들의 피를 저주하는 세 아들과 그들과 달리 보다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인간의 악한 면을 받아들이고 신의 섭리로 나아가려 하는 알료샤를 둘러싼 가족 이야기가 주이다.

네 아들을 둘러싸고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본성의 문제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위해 그 어떤 가치도 저버릴 수 있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인지, 신은 그런 인간을 변화시키고 보다 높은 가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게 존재하는가를 묻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표도르나 드미트리, 그와는 반대로 철저히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이반, 그 둘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알료샤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성인이자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해 주는 조시마 장로를 통해 러시아 가톨릭 지도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면서도, 모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을 벗어나 백치와 같은 자세로 신의 직접적인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유로지비'의 고행자들의 삶도 고결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읽으면서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가 놀랄 만큼 섬세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특히 신앙에 대한 본질적인 사색과 고찰이 깊이 있게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러시아를 둘러싼 각각의 인물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서 러시아의 정치-문화적 환경과 러시아정교의 역사적 특징들도 알 수 있어서 흥미롭게 읽고 있다.

예전엔 주된 서술자인 알료샤의 시선에 조금 더 기울어져 감상이 됐다면, 이제는 이반이나 다른 인물들의 시선에서 많이 바라보게 된다.

알료샤는 헤세의 작품에서 나르치스를 떠올리게 하고 드미트리골드문트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인데, 예전엔 드미트리가 표도르처럼 너무 욕구에만 충실한 하잘 것 없는 인간이라 여겨졌는데 이번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되는 걸 보면, 내가 나이가 들었나 보다.

도스토옙스키가 3년을 집필하고 3개월 만에 숨을 거두면서 유작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남 되었고, 20세기 철학과 문학,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끼친 영향이 막대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럴만한 작품이다.

한 가족의 비극적인 일대기에 그치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에서 신과의 관계, 신의 존재 여부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과 가치의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나는 본질적인 것을 묻고 그것을 다루는 작품들이 좋다.

소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부분들, 살다 보면 잊게 되고 편해지면 결코 생각하기 싫어하는 부분들을 자꾸 건드려서 생각하게 하고 다시 돌아보게 하고, 더 나은 가치로 나아가게 하는 작품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 세상은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고, 인간은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한다.

유신론자인 나는 인간의 영역 밖에 신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한계에 무릎 꿇지 않고,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보다 높은 가치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여러 면에서 이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도 있지만 끝까지 완독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전글 예술작품의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