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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드레 Jan 19. 2024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

얼마 전에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최은영 작가는 2013년 <쇼코의 미소>라는 소설로 등단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창작활동을 해 오고 있고, 2021년엔 <밝은 밤>이라는 장편소설도 출간해서 꽤나 좋은 평가를 받고 계신 작가다.

작가님의 소설들을 보면, 인간이 겪게 되는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당히 깊이 있게 바라보고 하나하나의 삶을 따뜻하게 이해하려는 시선이 느껴진다.

서사의 기술이 섬세하고 솔직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작년에 출간된 소설집은 2018부터 2021년까지 문예지를 통해 발표했던 7편의 단편을 묶은 것이다.

그중에 책 제목이 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이런 부분이 있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주인공 희원은 안정적인 직장인 은행을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영문으로 된 에세이를 읽고 토론을 하는 수업을 수강했다가 시간 강사인 그녀를 만나게 된다.

언제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학생들의 에세이를 평가하고 중재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그녀와 우연히 갖게 된 개인적은 만남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에세이를 출간했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의 에세이를 통해 그녀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알게 되어 더욱 그녀를 가깝게 느끼게 된다.

여성으로서, 꿋꿋이 자신의 영역에서 강단 있게 버텨내는 그녀를 보며 동경하게 되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

희원이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결정을 옹호해 주길 바랐던 그녀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현실적인 조언을 하자 실망한 나머지 그녀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게 된다.

둘은 서로를 오해한 채, 헤어지게 되고 희원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시간 강사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녀와의 인연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 저 문장들이 들어가 있다.

내게 저 문장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건,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적이 있어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대학원 진학을 고민했다.

나는 그 당시 희곡에 꽂혀 있었다.

졸업 논문도 <김우진론>을 썼었다.

친구가 연세대 영문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희곡론을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더니 교수님을 만나 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희곡론 분야에서 가장 권위자인 분이셨다.

연구실로 친구와 같이 방문을 했다.

인사를 드리자 대뜸 나에게 왜 희곡론을 공부하고 싶냐고 하셨다.

나는 순진하고 천진한 얼굴로

"희곡이 좋아서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시던 그 교수님이 물으셨다.

"집에 돈이 좀 있는가?"

"아니요, 그냥 평범합니다."

"그러면, 그냥 희곡을 좋아하는 걸로 끝내게!"

"........?"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이 바닥에서 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이제 정년이 몇 년 안 남았네.

그때까지 내가 밀어줘야 할 제자들이 많은데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떠나야 할 판이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게 현실이네."


그렇게 기대했던 교수님과의 면담이 이렇게 끝이 났었다.

나는 순진했고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였을 뿐이다.

그때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자가 되기 위한 코스를 밟았다면 어땠을까를 가끔 생각한다.

지금은 교수님의 말이 100% 맞았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친구가 대학원을 다니며 교수들에게 간이며 쓸개를 다 빼줄 정도로 교수들 뒤처리를 다 해주는 걸 지켜보면서, 각종 연구서며 논문을 제출하느라 탈모가 오고, 대학에 연구비를 어다 주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눈에 띄는 실적을 만들어 내느라 잠을 못 자는 걸 보면서 나는 절대 그 길을 끝까지 가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나 교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 빽없이 교수 자리를 얻기도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걸 그 교수님은 25살의 애송이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셨었다.

누구나 자신이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 꽃길이 아니더라도 그저 묵묵히 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그 길로 먼저 들어선 누군가가 있어 그 끝을 알려 준다면 선택이 훨씬 쉬워진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쉽진 않다.

또, 그 사람도 끝까지 가보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무엇에도 기대지 말고 지치더라도 꺾이지는 말고 가보자.

그래야 알 수 있다. 끝엔 무엇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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