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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레드넛 Jun 10. 2023

당신들은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

할리 베일리의 아리엘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

인어공주의 실사 영화 버전이 발표되고, 그 주인공으로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된 이래 인어공주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이젠 좀 지겨워질 정도다. 어지간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가면 할리 베일리가 분한 인어공주의 특정 이미지를 올리고 역겹다느니, 망한 PC의 예라느니 하는 글이 베스트를 점령하고 있는 꼴을 못 본 게 너무 오래될 지경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일어나지도 않았어야 하는 논란에 대해 느낀 점을 짧게나마 정리해 볼 생각이다.




흑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이 원작에 대한 훼손이다?



정말로, 할리 베일리가 원작을 훼손한 것인가


솔직히 말하겠다. 우습다.


원작 훼손? 그런 식이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역시 원작 훼손이다. 원작 인어공주는 양성애자였던 원작자 안데르센이 오랜 기간 짝사랑해 온 남성의 결혼 소식을 듣고 실의에 잠겨 쓰인 작품이다. 그렇기에 원작의 인어공주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비극, 그리고 불멸의 영혼으로서 끝난다.


디즈니의 인어공주에서 아리엘이 인어라는 환상의 종이 필멸의 인간으로 화하는 데 성공하여 인간의 생로병사를 겪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 것과는 정말 대조되는 영역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 자체가 인어공주 원작에 대한 훼손이었다. 당신은,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 역시 원작에 대한 훼손으로 바라보는가?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훼손된 원작'은 그래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어공주는 결국 월트 디즈니가 원작 훼손으로 시작한 2차 창작이고, 실사판 인어공주는 그 변주일 뿐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원작 훼손으로서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가?


할리 베일리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인어공주의 변주자들이 선택한 주역일 뿐이다. 2차 창작의 변주일 뿐인 작품에서 배우의 인종이 문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흑인 인어공주는 붉은 머리를 배제하는 차별이다?


나 역시, 이 아리엘을 보고 자란 것은 사실이다.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리엘의 머리는 붉은 머리다. 붉은 머리 배우가 아닌 흑인 배우를 채용하는 것이, 유서 깊은 붉은 머리 차별을 오히려 강화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선전하기 위한 '블랙 워싱'일뿐이라는 주장이다.


솔직히 말한다. 당신은 아리엘이라는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머리가 차별받았던 것에 대해서는 당신이 옳다. 생각해 보자. 아리엘 이전, 붉은 머리를 한 주연급 캐릭터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었는지. 아리엘은 사실상 붉은 머리를 가진 최초의 주연급 캐릭터였다.


그 이전까지, 붉은 머리는 문화적 차별을 받는 존재들이었다. 이스카리옷의 유다가 붉은 머리를 가졌다는 전승이 내려올 정도였으니까, 그 차별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리엘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화했다. 이제 붉은 머리를 가진 인물이 주역을 맡는다 해서, 그것에 도끼눈을 뜨고 바라볼 사람은 없다.


위키피디아에는 아예 붉은 머리에 대한 차별이라는 별도의 항목이 존재한다


아리엘이야말로 월트 디즈니가 만들어낸 최초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캐릭터였던 것이다.


그런 아리엘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흑인이 되었다. 백인이 아닌 흑인이 30여 년 동안 백인의 캐릭터로 여겨졌던 인어공주를 맡은 것이다.


그 자체로,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은 옳다. 그렇게, 언젠가는 아랍인 아리엘이, 동양인 아리엘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사회의 진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향유해 나갈 캐릭터가 바로 인어공주고, 그 인어공주에 다양성의 가치를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깊다.



할리 베일리가 레게머리를 유지한 것이 배우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 부족이다?


짧게 말한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언제부터 메서드 연기가 연기의 표준이 되었나? 드 니로 어프로치를 익히지 못하면 배우로 인정할 수 없나?


우리 모두가 인정할 명배우 앤서니 홉킨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히치콕 배역을 맡는다 해서, 나를 히치콕 씨로 부르지는 마라."


메서드 연기는 방법론의 하나일 뿐이다. 배우가 배역에 혼연일체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는 누구도 없다. 단지, 우리가 메서드 연기를 하는 소수의 명연기에 너무 깊이 빠졌을 뿐.


애초에 인어라는 실재 하지도 않는 종에 대해서 흑인 배우가 캐스팅되고, 흑인 배우의 특징적인 레게 머리를 하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애초에 아리엘은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고, 그 캐릭터를 어떤 실존하는 인물을 통해 표현할 것인지는 감독의 재량에 속하는 영역이다.


레게머리를 한 인어공주가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당신은 그저 할리 베일리가, 흑인이 인어공주를 맡은 것이 싫은 것이다



최근 모 국회의원과 모 광역자치단체의 장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정부를 수입해서 저렴한 임금으로 쓰자는 주장을 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저렴한 저출산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랬다면,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다.


솔직히 인정하자. 한국에는 인종차별주의자가 너무도 많다.


재한 이주민 중 70%가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의 인어공주 실사판을 대하는 커뮤니티의 정서에서, 나는 인종차별의 진한 악취를 느낀다. 아니, 차별을 넘어 혐오가 보인다.


영화의 취약한 만듦새가 아닌, 실사화의 문제가 아닌, 배우의 인종과 외모를 놓고 쏟아지는 비판 속에서, 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들을 본다.


나조차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여기 정리해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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