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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23. 2021

코로나 시대 KTX 여행, '잘 보는 사람'

여행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여행 좋아하나요?


저도 무지 좋아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참 오래 답답하게 살고 있다고요?


미치는 거죠. 사람 안 붐비는 곳으로, 가능하면 돈 덜 들이고, 건강하게 바람 쐴 기회, 늘 아쉽습니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짧은 여행도 조심스럽잖아요. 휘휘 바람 쐬고 싶은 계절이 다가오니, 수험생 막내아들이 안쓰럽고, 새로 공부 시작하는 딸이 짠해지는 엄마맘입니다. 그러나, 이건 외교적인 멘트일 뿐이고요. 지들은 지들 삶을 사는 거고, 저는 제 길을 가야죠. 석달 전에 했던 '내 몸 사랑 겨울 여행'의 속편 여행을 나섰습니다. 행여 막히고 답답한 눈이 좀 달라지고 몸이 더 튼튼해질까 하고 말이죠. (얼마나 더 튼튼해지려냐고요?)



여행 생각할 겨를 없이 일상을 살아내기도 버거운 시대 맞습니다. 차라리 좋은 점도 많고요. 렌선 여행도 있고 비대면 공연도 많고요. 기차도 비행기도 버스도 다 조심스러우니까요. 조심해야 맞고요. 그래서일까요? 여행 이야기를 쓰려니 공연히 조심스럽습니다. 왜냐면 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떠났거든요. 흔하디흔한 촌스런 인증 사진도 남겨봤고요. 2월 22일 아침 8시 10분 발 기차 타기 직전 제 모습입니다. 이른 아침 누군가에게 사진 부탁해서 찍었냐고요? 잘 보면 보일걸요? 동행해서 바래 준 짝꿍이 있었겠죠?





빨간 캐리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고요? 딸이 퇴사 기념으로 무슨 포인트로 사 줬답니다. (감상 포인트는 결코 자식 자랑이 아닌 색깔입니다!) 저는 아무 색이면 어떠냐, 때 안 타는 걸로, 적당한 가격으로, 뭐 이런 소리만 했거든요. 혼자 번쩍 들어야 할 때 무리 없을 정도의 크기가 필요했거든요. 중고로 사서 낡도록 써 본 습관 때문인가요? 사 주는대로 쓰지, 잘 볼 줄도 모르니까, 뭐 그런 맘 있었어요. 물건 잘 보고 잘 고르는 거 참 어렵잖아요.



그런데 딸은 그게 아니었어요.

"맘에도 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사는 김에 엄마 맘에 쏙 드는 걸로 골라야지. 이건 어때? 이건?....."



계속 이색 저색 보여주네요? 와~~ . 그런데, 이게 뭡니까. 바로 직전에 한 소리를 뒤집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이거야! 이거 좋다~~~ 새빨간 색이 맘에 쏙 드는 걸 어쩌냐고요. 맘에도 없는 소리 한 거 맞고 자신을 잘 못 본 소리죠. 바랄 수 없을 건 아예 바랄 생각을 안 하고, 선택지 없이, 주어진 대로 살던 습관이 무서운 거죠. 엄마 맘을 환히 들여다본 딸한테 두손두발 들어버렸어요. 그렇게 내게 온 빨간 캐리어랍니다.




코로나 시대 여행, KTX 차창으로 작별 인사하는 두 연인 모습 보이나요? 내다보는 제 모습이야 잘 보이겠죠. 오른쪽 아래 검게 비친 제 짝꿍 모습도 보이냐고요. 사진 찍고 있잖아요. 그러게요. 사람의 눈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본다잖아요. 저조차도 글 쓰려고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짝꿍 모습을 보게 됐어요. 둘이 함께 사랑하며 함께 산다는 건 이런 번거로운 일을 사서 하는 점도 있는 거죠. 잠이야 일찍 깨는 중년이지만, 이른 아침 안산에서 서울역까지 동행하고 짝꿍 사진을 찍는 짓, 그 사진에 찍힌 짝꿍 모습을 찾아내는 짓. 눈이란 이런 거 같아요.





서울역에서 출발 후 저는 룰루랄라 했어요. 코로나 시대 창가 좌석에 나 혼자로구나 해서 말이죠. 인증 사진을 남겼네요. 옆자리에 짐도 놓고 마우스패드도 놓고 독방을 즐기려 했어요. 그러나 광명역 가니까 사람들이 통로가 복잡하도록 타더라고요. 뭐지? 했다가 바로 아차, 했어요. 옆자리가 비어있길 바란, 내 맘대로 저는 본 거였어요.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완화됐는데 말이죠. 눈치코치 발동해서 저는 얼른 옆자리를 깨끗이 비웠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옆 좌석에 청년이 앉았어요. 코로나 시대 여행 풍경 또 한 번 다르게 펼쳐졌어요. 평소 저 같으면 옆 사람과 몇 마디 인사라도 했을 거예요.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안 하는 거 참 낯설거든요. 더구나 상대가 운동복 입은 청년이잖아요. 우리 막내 다리인가 했어요. 그러나 눈인사만 하고 침묵이었죠. 기차 안에서 음식 먹는 것도 수다 떠는 것도 하지 말라는 주의 안내 방송도 있었고요. 그래서 다리 인증만 살짝 남겨봤네요.





차창으로 이른 아침 해가 비쳐들었습니다. 저의 약한 지리 공간 감각을 깨우며 잠시 생각했죠. 내가 지금 서울역을 출발해서 포항으로 가고 있으니 남쪽으로 가는 중이지. 왼편이 동쪽이야. 그러니 아침 해가 이쪽에 있는 거구나. 차창 스크린을 올려서 해를 제대로 바라봤죠. 동쪽 해야 반가워. 나는 너를 무지 좋아해! 특히나 아침에 떠오르는 너를 마주 보며 걷고 사진 찍는 거 너무너무 좋아해. 오늘도 널 볼 수 있어서 반가워! 고마워~~~





아침 햇살 아래 펼쳐지는 풍경 구경을 좀 했겠죠. 마스크와 침묵과 거리 두기와 상관없이 자유로운 산과 들과 강을 볼 수 있었어요. 여행 실감이 나더군요. 노트북을 접었죠. 좌석에 비치된 2월 호 KTX 잡지를 집어들었요. 철도와 여행에 특화된 잡지잖아요. 평소 내 눈이 못 보던 걸 볼 필요가 있다 싶어서 말이죠. 놀라워라. 이걸 전에는 건성으로 휙휙 넘기기만 했구나. 이번엔 제대로 살펴봤어요. 이달엔 안동 여행을 특집으로 다뤘네요. 수준 높고 알차고 재미있는 정보로 가득했어요. 참 잘 만든 잡지로구나, 감탄하며 봤어요.



잡지란 휘리릭 넘기며 구경하는 맛이잖아요? 그러나 뒤에서부터 앞으로 다시 보면 볼 게 참 많기도 하죠. 기차 타고 가다가 일어날 수 있는 비상상황과 비상탈출 안내부터 새롭게 들어왔어요. 소화기 위치, 비상 알림 장치 위치가 나오길래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 봤네요. 출입문 상단에 빨간 손잡이도 빤히 쳐다봤고요. 전철과 마찬가지로 승강문 탈출이 어려운 경우 객실 양쪽 끝에 비치된 망치로 창문을 깨는 시스템이군요. 비상 사다리가 비치된 객실이 몇 개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됐고요. 제가 마침 비상사다리 있는 2호 차에 타고 있었네요.

KTX: 5호 차 14호 차

KTX-산천: 2호 차(일부 편성 4호 차)

ITX-새마을: 4호 차





평소 볼 수 없던 철도 뉴스를 보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인상적인 기사 몇 가지만 정리해 봅니다.


-작년 코로나 시국에 KTX가 의료 봉사자를 무임 수송했고 해외 입국자 전용 칸도 운영했다.

-KTX 창문에 열 차단 필름을 부착했다.

-KTX 장애인 테이블 높이를 조정하여 무릎이 닿지 않도록 조정했다.

-작년 말부터 열차 승차권 결제에 '네이버 페이'가 도입됐다.

-구글 지도와 교통 플랫폼 가지(ga-G)를 연동해 승차권 서비스 실행한다.

-한국 철도, 대전 지역 공기업 중 최초로 '나눔 명문기업'으로 선정됐다.

-명절 연휴 기간 사회적 거리 두기로 100% 온라인 예매를 실시했다.





다양한 책과 영화와 공연과 전시 안내가 많아 또 한 번 놀랐습니다. 혼자서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재미도 맛봤고요. 좋은 글 중 하나만 고르라면 신환희 수어 통역사 인터뷰 기사를 꼽고 싶네요.


"수어 통역사가 이브 리퍼(브리핑하는 사람)와 같은 라인에 서서 통역하고, 정부 브리핑을 수어로 크게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좋네요" 코로나 브리핑에서 달라진 점이잖아요? 농인들이 기뻐하며 말했다는군요. 2016년에 한국수화언어법이 공포되었다는 거 아는 사람? "한국수화언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 언어임을 밝힌다." 수어는 농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보통 언어가 가진 요소를 두루 갖춘 명실상부한 언어라는 겁니다. 언어에 관심 많은 사람으로서, 수어 공부를 꼭 해야겠구나, 다시 생각하게 하더군요.





"청인이 다수인 사회에는 소리로 이루어진 정보가 많아요. 그런 사회에서는 시각으로 정보를 얻는 농인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이런 제약으로 농인은 장애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청인이 농인을 장애인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잘 보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농인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도록 소리 정보를 시각화하는 일을 많이 하면 좋겠어요. 그런 일들이 수고나 배려가 아닌 일상이 되었으면 하고요. 시각 중심인 농인 사회에서는 청각 중심인 청인 사회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청인 사회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수어를 배워 '찐' 농인 사회를 경험해 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신환희 수어 통역사/ 사진: 한겨레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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