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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말씀, 또는 사나워지는 법

<나는 더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할말을 망설이고 산다

by 꿀벌 김화숙


달팽이의 말씀


김추인(1947~ )



그의 문체는 반짝인다


은빛이다

또 한 계절 생을 건너가며

발바닥으로 쓴

단 한 줄의 선연한 문장


'나 여기 가고 있다'



나는 참 복받은 사람이구나. 달팽이의 말씀을 읽으며 가슴이 충만해진다. 김추인 시인의 모습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모자를 쓴 멋진 얼굴도 확인했다. 나처럼 모자 좋아하는 분이라고 맘대로 생각해버리니 더욱더 가까이 다가온다. 단 한 줄의 문장을 쓰는 오늘 하루, 기대하며 내 걸음을 내딛자.


내가 쓰는 삶의 한 문장, 이라고 쓰고 보니 너무 거창하다. 발로, 온몸으로, 주어진 길을 갈 뿐이다. 달팽이는 달팽이의 방식으로, 그게 발인지, 혀인지, 몸인지 모르겠다. 다만 가다 보니 오롯이 그의 계절을 써 냈을 을 뿐이다. 그리고 단 한 줄의 선연한 문장이 남았을 것이다. "나 여기 가고 있다."


시를 읽고 생각하노라니 시 읽고 쓰는 한 친구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저께 늦은 밤에 말을 걸어온 친구. 그날따라 힘든 하루였고 혼자이고 싶은 날이었다고 고백한 친구. 이야기가 길어질 각이었다. 나는 긴장을 풀고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길게 답하면 잠을 놓칠 듯했다. 톡에 제대로 응하지 못한 게 맘에 걸렸더랬다.


그래, 친구야! <달팽이의 말씀>을 듣자꾸나. 오늘 하루, 온몸으로, 발로, 삶의 문장을 써내는 우리잖아. 일상을 시로 살아내는 너와 나. 우리 속도로 우리 방식으로 가다 보면 선연한 한 문장이 은빛으로 반짝일 거야. 보이잖아. 그렇게 응원하는 맘으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잖아. 친구 달팽이의 말씀이었다.


시 쓰는 친구를, 그리고 나를, 달팽이의 말씀으로 응원하는 아침이다.






오늘 치 백일 글쓰기는 <달팽이의 말씀> 단상으로 올리자 생각하며 밴드를 돌아보게 됐다.


100일 장정에 43일차다 어느새. 지난 4주 즈음에 글 몇 개 포스팅했으니 다시 몇 편 가져올 때 같다. 매일 쓰는 짧은 글 그대로 100일까지 실시간으로 갈까 고려 중이다. 한편 짧은 단상으로 매일 조금 쓰고 며칠 후 다시 갈무리하기도 하고 퇴고하는 재미도 있었다. 밴드는 실시간용으로 하는 게 맞아 보였다.


오늘 아침 <달팽이 말씀>과는 분위기 전혀 달라 보이는 글 두 편 가져온다.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앞뒤가 안 맞아서일까. 거창하게 스펙트럼이 넓어 보이려고? 이런 글도 쓰고 저런 책도 읽을 뿐이다. 달팽이 말씀, 시를 읽는 아침의 내 진심이었다. '사나워지는 법'이란, 또 다른 내 모습이다.


다른 분위기의 글을 연결하려니, 살짝 하품 나온다. 아니 미안한가? 그러나 다 내모습이다.







41일- 사나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청소년부터 중년까지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든 남자든 성별을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사나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읽고 있는 책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그레천 칼슨, 문학동네, 2018)에서 건진 한 문장이다. 실화 바탕의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의 실제 인물 중 한 명인 전 폭스뉴스 앵커 그레천 칼슨의 목소리다. 직장 상사의 성희롱을 폭로하고, 당당히 싸워 이긴 후 회고록을 냈다. 영화 토론 준비로 읽고 있는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암암. 나도. 제목이 맘에 들어서 무조건 산 책인데 묵히다가 이제야 읽는 거다. 나도 그렇게 살기로 했다. 잘 잡은 제목, 잘 쓴 책. 저자가 친구로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쓰고 싶은 좋은 제목 선점 당한 기분은 안 좋다. 아쉽다! 배아프다!) 그런데 책의 원제가 <Be Fierce!(사나워져라!)>란 사실! 한국 시장에서 너무 쎈 제목이라 바꾼 듯? 어쨌건, 거듭 칭찬해가며 읽는다.



우리는 모두 사나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문장이 마음에 계속 남는다. 나는 중년이 되어서야 사나워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늦되고 늦된 인생이다. 내게 사나워지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조건 매사에 여자는 부드러워야 하는 줄, 참고 품는 거라고, 잘못 알았더랬다. 장난해? 하기야, 딸 아들 할 것 없다. 자식에게 사나워지라 가르치는 부모 몇이나 되겠는가. 문제는 사나워져야 할 때가 분명 있다는 거다.



침묵할 때인지, 말할 때인지, 분별이 어려울 뿐이다. 말하되 부드럽게 할 때인지 사납게 해야 할 때인지, 그것 역시 분별할지어다. 싸워야 할 때는 있다. 안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더구나 내 존엄을 해치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책 마지막 장 "사나워지라"에서 그레천은 아주 진지하게 정리해 준다. 세 종류의 사람은 절대 잊지 말란다.

1. 당신이 힘들 때 도와준 사람.

2. 당신이 힘들 때 떠난 사람.

3. 당신을 힘들게 만든 사람.


그가 SNS에 한 포스팅이었다. 맞다. 나를 해치는 인간에게 긍휼? 개나 주라 그래. 스스로에게 단단히 거듭 용기를 선물하고 싶어 이런 포스팅도 했단다.


그녀는 작달막할지언정, 대단히 사납다.




그럴만했다. 맞아. 그는 결국 해냈다. 절벽에서 안전망 없이 번지점프를 하다시피, 직장 상사의 오랜 성희롱을 조목조목, 기록해뒀다가, 폭탄선언으로 폭로했다.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른 채로 뛰어내린 상황이었다. 그 표현이 정말이지 뼈 때리게 와닿았다. 그리고 그래천은 이겼다.


책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악마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폭풍을 맞서기엔 너무 약하구나.' 오늘, 나는 악마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내가 바로 폭풍이다.' 우리는 사나워질 것이다.

그레천 칼슨




그녀가 상세히 설명한 '사나워진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소제목들로 정리된다.


-사나워진다는 건 당당해진다는 뜻이다.

-사나워진다는 건 자신의 가치를 고수한다는 뜻이다.

-사나워진다는 것은 함께 일어선다는 뜻이다.

-사나워진다는 것은 믿는다는 뜻이다.

-사나워진다는 것은 전사가 된다는 뜻이다.





40일- 잘못된 걸 잘못됐다



깊어가는 밤 좋아하는 가수 신승은의 노래 <잘못된 걸 잘못됐다>를 듣고 있다. 책상 정리하다 작년 여성신문에서 받은 작은 수첩을 들여다보다 그리됐다. 스르륵 쪽을 넘기다가 '추천! 이 노래'라는 글자에 눈이 멈춘 거다. 여성신문에서 추천하는 건 어지간하면 다 읽고 보고 듣고 하는 편인데 빠뜨린 건가 했다. 목록 중 <잘못된 걸 잘못됐다>부터 듣는다.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 같은 신승은의 목소리와 노랫말이 낯선 듯 친근하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 그렇게 말했노라는 사람도, 그 말 듣고 펑펑 우는 사람도. 낯선데 또 낯익어 보이고, 익숙한데 말 안 되게 낯설어 보인다.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런데 일상 아냐?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의 고뇌요 분노요 고백으로 들린다. 내게로 공감의 강물이 흘러오는 밤이다.


젊은 날의 내가 보이고 떨리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자주 생각한다. 내 존엄을 내가 지켜내기 어려운 상황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어떤 상황. 존엄을 딱 생각하는 거 말이다. 말하는 게 맞나 마는 게 맞나. 어느 걸 선택하는 게 존엄의 길일까. 내 가슴이 떨리면 말하라는 신호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 말하기 두려운 상황인 게다. 존엄을 지키는 길에 서면, 나는 아직도 남몰래 떨며 갈등하는가 말이다.


얼마 전 한 교육장에서 내가 발언하던 상황이 훅 떠오른다. 남성 발제자 의견에 내가 다른 목소리, 즉, 페미니즘 관점으로 발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미 한참을 숨을 가다듬고 진정하며 할 말을 검열했더랬다.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에 남성들이 어떤 반응할지 나는 자꾸 계산하고 있었다. 내 말을 과연 얼마나 알아들을지, 재고 또 쟀다. 그러나 결국 나는 잘못된 걸 잘못됐다, 내 목소리로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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