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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11. 2024

그때 그 원피스

결혼에 준비되지 못한 내 내면은 추상화 원피스가 가려주었다.


 “봐라, 우리 딸들은 모두 원피스가 어울린다니까. 가는 허리는 살리고 엉덩이는 잘 덮어주니 참하네. 무늬도 좋고 단정하고도 멋스러운 게 딱 니옷이다. 됐다.”     


엄마는 나를 이리저리 돌아서게 하며 연신 옷을 쓰다듬었다. 만 스물여덟에 처음 하는 ‘멋쟁이’ 원피스 패션쇼였다. 반곱슬 어중간한 단발머리에 통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온 딸을 그냥 둘 엄마가 아니었다. 옷 사 입으라고 돈을 준들 시부모 자리에 첫인사 가는 옷을 잘 골라 입을지 미덥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장 좋은 대안은, 엄마가 직접 옷을 골라 사 입히는 것. 당신 마음에 딱 맞게 입혀 보는 중이었다.     


1990년 8월 하순이었다. 나는 베를린에서 한 학기 어학을 마치고 들어온 몸이었다. 와 보니 내 뜻과 상관없이 결혼식이 날짜까지 정해져 있었다. 9월 24일까지 남은 한 달 동안 양가 방문하고 결혼식 준비까지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C의 결정이었다. 약혼한 사이였지만 덕도 나도 결혼을 언제 어떻게 한다는 아무런 그림이 없던 때였다. 상상 속 먼 미래에 있던 일이 갑지가 우리 앞에 현실로 닥쳐버린 꼴이었다.  

        

덕과 나는 만나자마자 서둘러 양가로 '결혼 통보' 여행을 떠나야 했다. 영덕 우리 집에 먼저 들러 한 밤 자고 밀양에 한 밤 자는 계획이었다. 생전 처음 내가 데려온 남자를 우리 부모는 이미 ‘묻지 마’로 환대한 상태였다. 하나님의 종으로 내놓은 딸이 타국 만리 선교사로 갔다 돌아온 것도 반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신랑감까지 데려왔으니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동해바닷가도 거닐며 데이트하는 연인의 느낌을 잠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엄마가 서둘렀다. 다 좋은데 딱 하나 내 입성이 문제라고 했다.       

“그런 편한 옷을 입고 어째 시어른 될 분들한테 첫인사하러 간단 말이고. 머리는 저게 또 뭐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말하모 뭐하노. 나하고 같이 대구 가서 미장원 들르고 옷 한 벌 사 줄 테니 입고 가거라.”     


못 이긴 척 그렇게 엄마한테 이끌려 대구까지 갔다. 미장원에 들러 한 학기 동안 자란 반곱슬 머리를 적당한 단발로 다듬었다. 편한 신발이 벗겨지고 단정한 단화가 신겨졌다. 숙녀복 가게를 수없이 들락거리며 입고 벗고 또 입어 보며 원피스 한 벌을 골라야 했다.   

 

“아니, 꼭 원피스로 할 건 없잖아요. 나중에 잘 활용하려면 너무 멋 낸 원피스는 싫다고요.”    

 

내가 볼멘소리를 해도 소용없었다. 편한 치마나 바지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엄마에게 ‘조신한 처자’의 옷은 원피스라야 했다. 내가 고른 헐렁하거나 자유로운 디자인은 불합격이었다. 소매가 짧아도, 치마가 많이 길어도 불합격이었다. 엄마의 기준을 통과해 선택된 옷은 안이 비치지 않는, 무릎 아래로 얌전하게 치마가 퍼진 셔츠형 원피스였다.    

  

“8월 늦여름에도 더운데 안감 들어간 원피스를 한여름에 몇 번이나 입는다고 그래요. 돈 아까우니 활동적인 옷으로 사서 많이 입게 해요. 난 딱 떨어지는 옷보단 자유로운 스타일이 좋다니까.”   

  

그래, 자유였다. 베를린 자유대에서 지낸 한 학기는 내게 분명 자유의 공기를 맛보는 시간이었다. 사명과 훈련에 갇혀 있던 내가 자유로운 '신여성'으로 활보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곳을 좋아하고 잘 적응했다. 독일어를 나는 좋아하고 잘했다. 한국이란 나라엔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였다. 기말시험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고 여름 동안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가을 학기 준비와 진로 고민을 할 차례였다. 그러나 내 삶은 왜 그리도 내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야 했을까.


옷 값은 엄마 지갑에서 나오는데 내 말발이 설 리가 없었다. 고백하자. 그 나이 되도록 나는 돈을 제대로 벌어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한다지만 돈 한 푼 모아 놓은 것도 없었다. 대학 4년을 생활 장학금 받고 살아서였다고 변명하자. 동생들과 함께 자취하던 대학 3학년 여름 빡세게 한 것 말곤 아르바이트도 안 했다.  ‘사명 중심’으로 사느라 그랬다. 명색은 선교사였으나 베를린 생활비도 부모님이 댔으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원피스 무늬는 녹색 갈색 황토색 노란색이 꽃인지 이파리인지 형체를 알 수 없는 추상화였다. 지금 중년의 내가 입어도 어색하지 않을 우아하고도 단정한 분위기였다. 중년의 엄마 안목이었으니 어련했을까. 천은 하늘하늘 쉬폰이지만 안감이 진녹색으로 위에서 치마 끝까지 들어가 전혀 속이 비치지 않았다. 목둘레엔 넓은 셔츠 깃이 놓였고 앞으로 브이자로 적당히 파졌는데 아래로 치마 끝까지 굵은 금박 단추가 놓였다.     

  

당시 유행대로 전장에라도 나갈 듯 어깨뽕에 힘이 들어간 게 특징이었다. 팔꿈치까지 오는 넓은 소매와 끝이 접힌 소매 뒤쪽에 작은 단추가 달려 있었다. 어깨에서 가슴께까지 앞뒤로 넉넉한 맞주름이 내려오다 잘록하게 좁아지면서 오버 웨이스트로 치마가 연결되고 같은 천의 벨트도 있었다. 착용감도 좋았다. 걸을 때 앞뒤 두 개씩 잡힌 주름 끝에 넓어진 치마폭이 바람에 살랑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아들이 고자인 줄 알았더니 어디 이래 참한 처자를 숨겨놨다가 이제야 데려왔다노!”     

원피스를 입은 나를 맞으며 덕이 아버지가 하신 첫마디였다. 그는 나를 향한 만족과 기쁨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중엔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우스개도 많았다. 나는 다만 듣고 있었다.


“이래 가지고 배추 한 포기나 들겠나. 너그 엄마는 쌀가마니도 드는데.”

“저놈이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내가 몰랐다. 맏며느리가 잘 들어오니 이제 맘이 놓인다.”

“살다 보면 남자는 누구나 한 번쯤 외도다 바람이다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럴 때 여자가 잘 참고 받아줘야 가정이 유지된다. 알제? 명심하고 시작하거라.”     


결혼에 준비되지 못한 내 내면은 추상화 원피스가 가려주었다. 사랑도 결혼도 믿음도 사명도 그땐 다 추상화였다. 경제적으론 부모님께, 정신적으론 단체에, 의존하고 사는 주제에“믿음과 순종”을 노래하고 다니던 때였다. 자아도 의지도 선택도 내것이 없으니 욕망도 고민도 다 뜬구름이고 구체적인 게 없었다. 그러나 결혼 승낙도 결혼식 준비도 일사천리 진행되었다. 모든 절차적 수고와 비용은 양가 부모님 몫이고 주관은 선교단체가 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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