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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12. 2024

주님의 종에게 아기띠를 띠게 하냐고?

잠시 유럽 공기를 쐐었다지만, 나는 여전히 80년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연재 순서 상 12번쯤 됨을 밝힌다. 종이책으론 제 2장 마지막 꼭지가 될 것이다.

          

“간다 간다 하면서 아이 셋 낳고 간다.”    

 

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실행하지 못하거나 계속 늦어지는 경우에 쓰는 속담이다. 애를 셋이나 낳도록 지체됐으니 이제 아주 못 갈 수도 있겠다. ‘선녀와 나무꾼’에서도 ‘선녀가 애 셋 낳기 전엔 날개옷을 보여주지 말라’ 했지 아마. 애 하나는 업고 둘은 끼고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버전도 있다지만, 애 셋은 분명 문제적이다.

   

한때 비혼주의자를 꿈꾸던 내가 애 셋 딸린 아줌마가 되었다. 뭘 알았으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뜬구름 좇는 청춘에 결혼 주례사가 “생육하고 번성하라” 아니었던가. 열심히 사랑하며 '말씀을 따라' 살다 보니 그리 되었다. 애 셋 딸린 나는 이제 날개옷을 잊은 아줌마로 살 팔자일까?  


   

셋째는 아빠가 낳았지     


띠동갑 세째라서일까,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난산’이 될 수 있었다. 분만대에 올라간 후 1시간은 흐른 느낌이었다. 아이 머리가 보인다는데 나는 기운이 달렸다. 진통이 와도 힘을 줄 수 없으니 호흡할 기운도 없었다. 숨을 못 쉬면 기운은 더 없어질 테고 아이에게 산소공급이 안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산모와 아이가 위험해지는구나, 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 더는 못하겠어. 억지로 끄집어내든, 배를 가르든, 알아서 해 줘 제발.”

내가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내뱉었다. 진심이었다. 포기할 수 있으면 하고 싶었다. 순간 분만대에 붙어 선 덕이 내 오른손을 더 힘 있게 잡았다. 내 어깨에 그의 한 팔이 둘러졌을 것이다.  그의 머리가 내 오른쪽 귀에 바싹 붙더니 힘 있게 속삭였다.

“이제 다 됐어. 조금만 참아. 자, 다 왔어.”

코치의 구호에 맞춰 달리는 선수처럼 내가 다시 진통의 파도에 올라탔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숨을 들이쉬고 다시 힘을 주었다. 덕이 함께 호흡의 파도를 타며 간절하게 소리쳤다.

“주여~ 주여~ 힘주소서. 주여~”

그의 뜨거운 입김이 내 귀속으로 몰아쳐 들어왔다. 나는 그 힘에 실려가듯 마지막까지 힘을 주고 가쁜 숨을 쉴 수 있었다. 우리의 잡은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이런 감동적인 분만은 처음이에요! 분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감사해요.”

간호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거듭 고백했다. 곁에서 인상 좋은 의사가 우리를 보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제가 약속하고도 꼭 들어오시려냐 시비를 걸었는데. 제가 큰 실수할 뻔했어요.”


그랬다. 동네 산부인과 의사는 전례가 없다며 덕이 분만실에 들어오는 걸 어렵게 허락했더랬다. 폴란드에서 큰애 둘 때도 그랬지만 막내 땐 고통이 더 큰 만큼 숙덕의 동지애도 더 커졌다. 이후 우리 집엔 ‘막내는 아빠 힘으로 낳았어’라는 우스개가 전해지게 되었다.     


           

주님의 종에게 아기 띠를 하게 했냐고?     


세 아이 엄마로서 나는 늘 체력이 달려 헉헉댔다. B형 간염 보유자라 자신할 수 없는 건강이었지만 ‘오직 믿음’이 건강을 지켜준다고 믿고 살던 때였다. (나는 2014년 간암진단받고 간 20%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병원을 버리고 단식 등 자연치유를 실천했고 2017년 B형 간염 항체를 얻었다. 이후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몸으로 살며 책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생각비행, 2022)를 냈다.) 막내를 젖 먹여 재울 땐 내가 기진해 먼저 잠들어버리고 아이는 깨어 노는 경우가 흔했다.      


허리가 약해 가사노동과 세 아이들 놀아주는 게 늘 몸에 부쳤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한 팔에 아이를 끼고 활보하는 모습을 나는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보곤 했다. 두 팔로도 힘들거니와, 혼자 유아차로 외출하는 것도 아이들 데리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모두 중노동이었다. 첫째 때부터 아이들을 몸으로 돌보는 일은 덕이 몫이었다. 씻기는 일, 몸으로 뒹굴기, 공놀이, 운동 가르치기, 그리고 외출 시 아기띠 하기 등이 그랬다.  

  

1998년 4월 하순 어느 일요일이었다. 부활절 기념으로 안산과 서울 두 공동체가 연합예배로 서울에서 모이는 날이었다. 안산 공동체의 식구들이 우리 가족과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로 ‘나들이’를 했다.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 띠를 띠고 더러는 자동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모처럼 설교를 안 해도 되는 날이라 덕이 젖먹이 막내를 띠띠고 아기 용품 가방을 메었고 내가 양손에 여섯 살 훈이와 다섯 살 지야 손을 잡고 갔다.  

    

예배 장소는 캠퍼스 내 동문회관이었다. 캠퍼스엔 벚꽃 잎이 흩날리고 푸른 새순이 아기손처럼 사랑스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놀이 공원이라도 온양 즐거워하는 아이들 손을 잡고 널찍한 예배 장소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믿음의 선후배들과 진한 악수도 하고 수다도 떨었다. 아이들과 앉을자리를 잡아 앉으려 할 때였다. 서울의 담임 A의 사모  J가 다가왔다.     


 사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군요. 어떻게 예배 오면서 주의 종에게 아기 띠를 띠게 할 수 있어요? 어서 다니엘 목자님께 아기를 받아와 맡으세요.”

즐거운 잔치 분위기에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지고 있었다. 나는 먼저 인사부터 한 후 어떤 반응을 할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J는 엄한 시어머니 목소리로 한번 더 다그쳤다.

“사모가 주의 종을 그렇게 동역하는 거 아닙니다. 어디서 배웠어요. 어서 아기 받아와요.”     


나는 아이들이 알아들었을까 좀 민망했다. 다행히 애들은 지들끼리 장난하고 있었다. 왜 이런 상황이면 내 목소리는 안으로 잠겨 들어갈까. 나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아이들을 먼저 자리에 앉게 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몇 발짝 떨어져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던 덕이 곁에 와 있었다.   

  

“아기띠요? 힘센 아빠가 맡는 게 훨씬 낫죠. 허리도 약한 사람이 띠 띠고 장거리 다니는 건 너무 무리예요. 저한텐 일도 아닌데 이럴 때 책임지는 게 맞잖아요?”


덕은 심각할 것 없다는 듯 아주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웃는 낯에 침 뱉을 수 없었을까, J는 더 이상 말할 의욕을 잃은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섯 식구가 나란히 앉아 예수의 부활을 찬양할 수 있었다. 막내는 아빠 품에서 새근새근 계속 잤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는 지금 여기 아줌마의 인생엔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여성신문과의 조우     


두 돌 넘긴 막내를 이웃 할머니께 맡기고 서울로 사모모임 가는 길이었다. 상록수역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옆 사람이 읽는 신문을 곁눈으로 보게 됐다. 내가 모르는 내용으로만 도배된 신문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호주제 폐지 투쟁, 부모성 함께 쓰기, 처음 보는 여성 단체 이름 등등, 뉴스마다 다 낯설었다. 모르는 게 그렇게 많은데 어찌 지나치랴, 나는 어느새 질문하고 있었다.   

     

“죄송한데 이거 무슨 신문이에요?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

가판대에선 본 적 없는 신문 같았기 때문이다. 불쑥 방해하고 들이대는 나를 중년 여성은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방에서 원통형으로 접힌 종이 띠지를 꺼내 건네며 친절하게 말했다. 주소와 전화번가 적혀 있었다.

“여성신문이라고 해요, 여기로 전화하세요. 구독 신청하면 받아볼 수 있어요.”      

사역과 가정에 코를 박고 살던 아줌마와 여성신문의 조우였다. 나는 그날 전화로 구독신청을 했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1989년 말에 창간된 국민주 신문이자 한국 유일의 여성정론지였다. 해직기자들에 의해 1988년에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은 87 이후 많은 변화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잠시 유럽 공기를 쐐었다지만, 나는 여전히 80년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여성신문 구독은 내 본능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나를 이끈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시야가 좁아져 있는지 화들짝 놀랐다. 골방에 갇혀 쪽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을 따라가듯 나는 여성신문을 통해 비로소 바깥으로 귀를 열고 눈을 향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우고 경험한 것, 내가 속한 단체, 그리고 내가 믿는 것들을 다른 랜즈로 보기 시작했달까. 신문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과 책과 영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공부했다. 신문을 탐독하는 옆에서 덕은 가끔 빈정대곤 했다. 내가 낯선 길로 갈 게 두려워서 그랬을 게다.     

 

“저렇게 여성운동이랍시고 하는 여자들은 집에선 애들하고도 남편 하고도 엉망으로 살 거야. 저러고 밖에 설치고 다니니 집안 꼴이 어떻겠냐. 믿음 있는 여자들은 저렇게 욕먹을 짓하고 돌아다니진 않지.”

나도 그런 생각하던 때라 결코 그에게 반박하진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를 달래는 주문을 외웠다.

'난 그런 여자 아니잖아요.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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