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May 07. 2024

환갑 아들이 92세 엄마 돌보기

가부장제 사회의 큰아들로서 아무래도 내가 받은 특혜가 많았을 테니까.

“단기간은 몰라도 이건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아니야. 내 삶이 엉클어져서 외부 활동도 글쓰기도 할 수가 없어. 도무지 집중이 안 돼. 이러다간 내가 병날 것 같아. 형제들과 의논해서 해결책을 찾아봐.”     

 

구순의 엄마가 우리 집에 온 지 3주쯤 지난 재작년 여름 일이었다. 시골집에 혼자 지내다 쓰러진 엄마가 급한 대로 우리집에서 회복해 가는 중이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짝꿍 숙이 내게 심각하게 문제 제기했다. 지속 가능한 시스템 찾기,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 ‘돌봄’이라는 과제였다. 큰며느리로서 숙이 받는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내가 간과한 게 문제였다. 처음 겪는 일, 혼돈과 시행착오를 차고 넘치게 겪으며 어느덧 2년이 차고 있다.   

   

환갑 큰아들이 92세 엄마 돌보기, 이게 최근 2년간의 내 생활이다. 아이들 다 커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도 해서 이제 자유로운 중년인데,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를 내가 돌봐야 한다. 엄마가 창원 동생 집에 가면 석 달이 후딱 가고, 서울에 있을 때는 석 달이 참 길다. 노인복지 시스템 덕에 그나마 종일 매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누나들이나 여동생보다는 차라리 내가 하니 마음이 편하다. 가부장제 사회의 큰아들로서 아무래도 내가 받은 특혜가 많았을 테니까.   

       


독거하던 구순 엄마가 쓰러졌을 때    

 

2022년 5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전화벨과 함께 뜨는 이름이 창원 사는 남동생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밀양 시골집에 혼자 사는 엄마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단다. 병원에서는 뇌경색으로 인한 오른쪽 편마비라고 했다. 나이를 고려할 때 수술은 어렵고 약을 먹기로 했다. 당일에 퇴원한 엄마는 일단 동생 집으로 갔다. 거동이 불편해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엄마를 안산 우리 집에 데려와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엄마, 누나들, 동생들, 누구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장남 콤플렉스인가? 착한 아들 콤플렉스인가? 모르겠다. 부담감 속에 결국 짝꿍 숙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엄마를 우리 집에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 숙은 내 마음을 이미 다 읽고 있는 듯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창원 동생 집으로 가서 엄마를 안산으로 데려왔다.   

   

나는 주 초반에는 안산에 있으면서 회사에 출근해서 노동했고, 주 후반에는 서울에서 교회를 돌보며 설교를 준비했다. 책임감, 부담감에 엄마를 데려왔지만, 엄마를 돌보는 건 숙이 혼자 거의 다 해야 했다. 다행히 엄마는 두 주 후엔 보조기에 의지해 보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식사, 세수와 양치, 대소변, 목욕 등 기본 생활도 점점 가능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숙이 엄마에게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양등급을 받고 주간보호센터나 방문요양 등을 알아봤다. 주간보호센터가 가장 이상적이긴 한데 문제는 우리 집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 같은 4층이라는 거다. 평지도 겨우 몇 발자국 걷는 엄마가 매일 오르내리는 것도 무리이고, 여러 가지 활동으로 바쁜 숙이 시간에 맞춰 엄마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것도 무리였다. 엄마를 시골집으로 보내는 것도 생각했다. 요양보호사가 집에 와서 식사 준비 등을 해 주면 시골집이 엄마에겐 제일 좋은 환경이다 싶었다.   

   

형제들은 다 미심쩍어했고 남동생은 분명하게 반대했다. 불편한 몸으로 시골집에 혼자  지내다 넘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고, 동네 사람들 눈도 있고, 자식 다섯을 두고 그런 몸으로 혼자 살면 엄마도 슬플 거라는 이유였다. 가장 가까이 사는 자기가 너무 부담이 된다고도 했다. 동생은 자기 집에 데려가 주간보호센터에 보내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에, 또 배웅과 마중을 직원이 해 준다고 했다. 동생에게 공감이 되었다.    


     

큰아들인 내가 돌보는 게 답이었다    

 

엄마는 안산 우리 집에 한 달 지낸 후 창원 동생 집으로 가게 되었다. 동생과 제수씨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엄마도 동생 부부도 좋다니 나머지 형제들은 돌봄 문제를 잊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넉 달이 되어갈 때쯤 동생 부부가 극심한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토로했다. 청력이 약한 엄마와 소통이 쉽지 않고 평생 촌 생활이 몸에 밴 노인이니 충돌이 잦았을 것이다. 나는 제수씨의 입장과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수씨 제안으로 결국 엄마는 그때부터 동생 집과 우리 집에서 3개월씩 번갈아 가며 돌봄 받게 되었다.    

 

엄마가 다시 온 첫 3개월은 우리 부부에게 길을 찾는 시간이었다. 숙과 내가 둘 다 바빠 엄마는 2주씩 두 번 요양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첫 입원은 엄마가 원한 바였다. 입원하면 몸이 더 좋아질 기대가 깨지고 엄마는 금방 요양병원을 질색했다. 후엔 내가 안산과 서울로 이동할 때 엄마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안산에 있을 때는 숙이, 서울에선 내가 돌보는 식이었다. 집에 종일 지내는 게 대안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안산 일을 거의 줄이고 작년 봄부터 서울에서 상주하며, 엄마는 낮에 주간보호센터에 가게 됐다. 숙은 안산에서 활동하고 주말에만 서울에서 엄마를 본다. 이게 현재까진 우리 부부에게 최선의 시스템인 셈이다.  

   

엄마 나이 92, 내 나이 60, 이렇게 모자가 매일 얼굴 보면서 한집에 살고 있다. 돌아보니 철든 후 이렇게 엄마와 같이 지낸 시간이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 곁을 떠나 마산 작은 집에서 학교 다녔다. 방학 때만 집에 가서 엄마 밥을 먹었다. 그마저도 고등학교 이후로는 방학 때 며칠 집에 다녀오는 정도였다. 

   

엄마는 참 고집스럽다. 전기, 물, 휴지 등을 아끼는 게 내 기준에서는 병적이다. 가난한 시절에 몸에 밴 걸 알지만 나는 화가 난다. 냄새나니까 목욕하라 해도 괜찮다며 우긴다. 혼자서 외출하는 건 위험하다고 해도 비틀대며 혼자 몰래 시도한다. 이렇게 의견이 충돌할 때 달래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이기고 때로는 엄마가 이긴다. 


아이고, 인생이 그렇지 뭐 어쩌겠나. 효자니 불효자니, 효도니 그런 구닥다리 부담스러운 말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구순의 노모와 60의 큰아들이 인간 동료로 어떻게 재미있게 지낼 것이냐, 지금은 그 생각뿐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식사 맛있게 잘하고 ‘한국인의 밥상’을 즐겁게 시청하면서 잘 지내는 게 고맙다.  /덕이

이전 01화 호랑이 풀 뜯어먹는 소리, 연재를 시작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