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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Aug 21. 2024

새 여권을 만들었다, 10년간 몇 번이나 쓰게 될까?

여권 따위 없이 발로 북녘땅을 걸어 백두산에 갈 날이 오겠지?

백두산 여행 준비로 여권사진을 찍고 여권을 재발급받았다.


오래간만에 사진관에 가서 반듯하게 앉아 사진을 찍고 30,000원을 썼다.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로 살다 보니 증명사진도 화장기 없이 박아버렸다. 당연한 듯이 '뽀샵'을 잘해주겠다는 사장님,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제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뽑아 주세요. 아주 민망하지 않은 정도로만요."

회색머리와 주름진 맨얼굴이 무슨 흉이란 말인가. 다행히 내 뜻이 잘 반영된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여권 재발급엔 47,000원 썼다. 솔직히 너무 비싸다 싶어 10년 복수, 26면 얇은 걸로 결정했다. 3천 원만 더 주면 58면짜리로 할 수 있었지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였다. 여행에서 조금이라도 얇고 가벼운 여권으로 다니고도 싶었다. 앞으로 10년 간 여권 26면이 모자랄 일은 없을 거란 생각, 너무 소심한가? 그래, 새 여권을 만들었다. 10년 간 과연 몇 번이나 쓰게 될까?


새로 찍은 여권 사진이 맘에 들어 올려 본다.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공개적으로 쓰다 보니 사진 올리는 일쯤은 별 게 아니게 됐다. 이 중년 아줌마의 맨얼굴을 누가 가져다 나쁜 용도로 쓸 일은 없겠지?



과천으로 출근하던 시절, 12년 전 여권 발급 때가 생각난다 내가 속한 부서가 보건복지부 평가에서 상을 받아 단체로 중국 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때도 여행 앞두고 부랴부랴 재발급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반듯하고 고달픈' 내 얼굴보다 12살 더 먹은 60대 얼굴이 훨씬 더 맘에 드는 건 왜일까? 날이 갈수록 내가 맘에 드는 걸 어쩌겠나. 헌 여권과 함께 그 사진도 세월의 먼지 속으로 잠자게 될 것이다.  


여권은 내 모습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달라진 게 많았다. 표지 디자인과 색깔이며 종이 재질이 그랬다. 겉장을 열면 나오는 장이 가장 낯설어 보였다. 중요한 개인 정보들이 크고 작은 내 사진들과 함께 코팅보다 두껍고 빳빳한 투명재질 속에 담겨 있었다. 한글과 영문으로 된 '주의'가 잘 말해주고 있었다.  


"주의Caution"

이 여권에는 민감한 전자 칩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여권을 접거나 구멍을 뚫거나 극한 환경(온도, 습도)에 노출하면 여권이 손상될 수 있으니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칩이 내장된 그 두꺼운 첫 장을 넘기면 외교부장관 명의와 직인이 찍힌 안내 문장이 하나 더 나타났다.

"이 여권을 소지한 대한민국 국민이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와 보호를 베풀어 주실 것을 관계자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내가 어느 나라에선가 외국인이 되었을 때 이 여권이 나를 증명할 거란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내가 아무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편의와 보호를 베풀어 주라는 부탁이었다. 아, 이 대목에서 나는 왜 바로 한반도의 북쪽 나라를 생각하고 마는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로 입에 달고 살건만 나는 백두산을 북녘 땅을 통해 갈 수가 없다. 같은 민족이요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인데 '조선민주인민공화국'에선 이 여권이 아무 힘이 없다. 이게 뭐꼬?


한국의 '여권 파워'가 세계 2위라는데, 192개국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다는데, 남북한은 서로 적대적이다. 세계 2위면 뭐 하나. 이 여권으론 북조선에 갈 수가 없다. 특정 국가의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합산해 산출하는 '헨리여권지수'는 한국이 전체 227개국 중 여권 파워 2위라고 한다. 192개국에 북조선은 없으니 내가 북조선 땅을 통해 백두산 가는 길도 없는 거다.


여권 파워 1위 국가는? 일본이다. 우리보다 하나 더 많은 193곳에 쉽게 입국할 수 있단다. 싱가포르가 한국과 함께 공동 2위, 독일과 스페인이 공동 3위로 190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4위는 189곳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핀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다. 온 세계에 적을 만드는 미국은 역시 여권 파워 최강국이 될 수 없겠다. 아, 남북이 무비자로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길, 한국이 여권 파워 1 위국이 되길 꿈이라도 꾸련다.


그나저나 이 기후 위기 시대에 새 여권은 몇 번이나 써먹을까? 그레타 툰베리처럼 기후 생각해서 절대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결심을 나는 못하겠다. 백두산에 가고 싶은데 가는 팀에 묻어 비행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소 깊이 생각하지 않던 통일까지 생각이 미친다. 아, 한민족이 어우지고 오가며 사이좋게 공존하는 길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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