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엄마, 나도 엄마처럼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1.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장혜영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
https://youtu.be/q85QNm5_eJ0?si=w3QRlZs0AsGavkw_
2. 사랑하는 내 딸아!
모야 추루냐! 10월 15일, 네가 만 서른한 살이 되는 생일날 아침이야. 31번째 생일을 뜨겁게 축하해!
기억력 나쁜 엄마지만 네가 태어난 날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어. 둘째라고 출산이 더 가볍다거나 두렵지 않은 게 아니더구나. 15개월 차이 연년생을 낳느라 파김치처럼 지쳐있던 게 생각나. 둘째는 쑴풍 쉽게 낳는다는 사람도 있더라만 엄만 입덧도 산고도 산욕도 고스란히 겪었더랬지. 생각해 보렴. 널 낳던 날 엄마 나이가 바로 지금 네 나이였어. 어린 엄마 참 장하지 않아? 다 알았다면 세 아이의 엄마가 어찌 됐겠어?
사흘 만에 너를 안고 퇴원하던 날 바르샤바엔 첫눈이 내렸지. 길고 춥고 눈 많은 폴란드 겨울의 시작이자 두 아이 엄마라는 낯선 계절의 시작이었지. 아빤 출근하고 엄만 하루 종일 네게 젖꼭지가 붙들려 있어야 했지. 젖이 잘 안 나와서 넌 배가 고팠던 거야. 며칠을 시달리니 완전 모유수유는 불가능한 길로 보이더구나.
너를 떼놓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우윳병을 준비하던 찰나, 보건소에서 사람이 왔어.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신생아와 산모가 있는 집을 방문하는 폴란드 시스템이었지. 우윳병을 손에 든 엄마와 눈이 딱 마주친 중년의 폴란드 아줌마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어.
"뭐 하나요? 우윳병을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젖은 결국 나오게 돼 있어요…"
눈물이 찔끔하도록 야단맞으며, 엄만 우유병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야 했어. 그날부터 엄마는 젖꼭지에 피가 나고 아무리 아파도 모유수유를 포기하지 않았지. 지금 돌아보면, 그게 뭐라고 그렇게 신성하게 지키려 했나 싶어. 네가 그런 고생을 한다면 엄만 틀림없이 우유 먹여도 된다고 할 거야. 뒤쪽이 납작하게 찌그러진 네 머리통이 그때의 참상을 잘 보여주지. 과연 차차 젖은 늘더구나. 모유만 먹고 포동포동 살찌며 넌 18개월이 돼서야 엄마 젖꼭지에서 떨어지더구나.
사랑하는 딸아! 요런 영웅담이라도 없었으면 엄마의 스펙이 너무 빈약할 뻔했어. 31년간 네가 엄마를 힘들게 한 기억이 워낙 없잖아. 멋진 딸, 엄빠의 좋은 친구요 선생, 무슨 주제라도 묻고 수다 떨 수 있는 대화 상대. 개떡 같은 엄마 질문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토론하며 웃고 즐기는 친구. 모녀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싸움의 동지, 여성연대 최강 페미 모녀. 엄마는 우리가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모야 추루냐, 네 생일 아침에 오랜만에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노래를 이슬아 장혜영의 목소리로 들었어. 딱 네 또래잖아.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새롭게 들리더구나. 이슬아의 결혼식 영상도 찾아보았어. 당찬 젊은이들이 컨베어벨트 같은 결혼식 말고 자기만의 사랑과 결혼을 만들어가는 모습 너무 좋더라. 내 딸 일인 양 울컥하며 응원하며 봤구나. 그래 딸아, 이게 엄마의 생일 축하 덕담이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포기하지 말고 꿈꾸자꾸나.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꾸나.
엄마가 이번에 영덕 할머니께 다녀오며 새롭게 보게 됐어. 많이 편찮으신 할머니가 문득 복 받은 분으로 보이는 거야. 무사히 할머니가 되셨고 나와 너까지 모녀 3대를 보신 거로구나. 할머니도 엄마가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모녀 3대를 보길 응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 모녀 3대의 꿈, 욕심일까? 내가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네가 엄마가 되고, 최강 페미 모녀 3대를 보는 꿈, 딸아 꿈꾸길 멈추지 말자꾸나.
모야 추루냐, 네 말대로 엄마의 청춘의 시행착오는 모두 너라는 탁월한 딸을 얻는 값이었어. 너만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너희 3남매를 낳은 건 돌아볼수록 엄마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었어. 물론 아빠와 결혼 한 게 그보다 먼저 잘한 일이었겠지? 물론이야. 물론 어, 어, 뭘 모르고 여기까지 왔지만 말이야. 내 딸, 모야 추루냐, 네 생일이라 엄마가 이렇게나 기뻐. 탕웨이 모녀 3대처럼 우리도 사진 찍자.
2. 입원 중인 구순의 친정 엄마에게!
엄마한테 가서 3박 4일 함께 지내고 돌아온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어. 이번에 엄마와 함께 한 건 내 인생에 특별한 시간이었어. 37년 전 내가 아파서 집에서 보낸 한 달 말곤 가장 긴 시간이었던 거 알아? 철든 이후 엄마한테 간다는 건 하루이틀짜리였지. 엄마가 90 노인이 되고 내가 60이 넘으니 이제야 조금 모녀가 편한 친구로 느껴지고 있어. 그런데 엄마는 자꾸 쇠약해져만 가네.
엄마, 엄마 딸로 태어난 것부터 엄마의 사랑과 수고로 내가 오늘까지 온 거 알아. 모든 것에 감사해. 그 어린 19살 소녀가 시집와 대가족 살림을 맡고 다섯 아이 낳아 키우며 힘든 농사일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정말 수고했어 엄마. 그 강인함과 헌신과 열정이 고마워. 여자라는 이유로 못 배운 한으로 당신 아들딸 낳으면 모두 공부하게 해 줄 거라 결심한 울 엄마. 내가 요만치라도 눈뜨고 살게 해 준 것 고마워.
엄마! 수혈 잘 받았어? 엄마 방광에 있는 종양은 암인 거 알지? 혈뇨가 방광암의 증상이거든. 피가 덩어리로 나오는 혈뇨가 멎지 않잖아. 이젠 몸이 힘들어 검사도 수술도 안 하고 싶다는 엄마. 시골 병원에 그대로 있고 싶다는 엄마. 난 이게 맞나 자꾸 질문하게 돼. 이대로면 시름시름 사그라드는 엄마를 봐야 할 게 슬퍼. 나도 엄마가 너무 고생하지 않고 잘 떠나길 바라. 그러나 노년의 엄마와 친구로 더 함께하고 싶은 걸.
이제 엄마랑 점점 말이 편히 통하는데, 인생은 왜 이리 개구라 사기꾼일까 엄마. 엄마와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엄마가 기다려줄 것 같지가 않네. 이제야 엄마 삶을 조금 더 알겠는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이때 엄마 맘이 이랬겠구나, 더 엄마에게 동지애를 느끼는데 말이야. 엄마랑 제대로 여행도 하고 재미있게 놀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엄마 어쩌면 좋아. 인생이 정말 짧고 너무 다 속임수 같아 엄마.
오늘 엄마 손녀 민지 생일이야. 엄마 손녀가 참 멋진 사람이지? 엄마를 통해 나도 아이들도 삶의 중요한 진실을 자꾸 확인하고 있어. 누구나 늙고 결국 죽는다는 진실 말이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더 생각하게 돼. 손녀 세대 젊은이들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 나도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엄마처럼 손녀를 볼 수 있을까? 더 멋진 모녀 3대를 살아보는 꿈을 꾸고 있어. 엄마 괜찮은 꿈이지?
엄마 사랑해!